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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Dec 20. 2019

아다지오의 재발견!?

느린 악장 사용설명서

 일단 오해하지 말고 넘어가자. 느린 연습의 효과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느린 연습을 함으로써 미스터치를 예방할 수 있고 빠른 템포(원템포)로 연주할 때 소홀히 지나가던 부분을 한 번 더 짚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느린 템포로 연습하는 것에도 분명히 부작용이 없지는 않다. 본래 빠른 템포의 곡인 경우 물리적인 힘보다는 유연성이 필요할 때가 많고, 힘을 어디에 주고 어디에 빼야 하는지 계획이 다 서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쇼팽의 연습곡 “겨울바람”의 그 무식할 정도의 빠른 템포의 오른손 음형들을 모두 짓눌러서 친다고 상상해보자. 팔이 떨어져 나가겠다 싶을 정도로 힘들 것이다. 그래서 템포가 빠른 곡의 경우, 원템포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무리없이 칠 수 있을 정도의 연습용 템포를 만들어놓고 힘을 주고 뺄 부분들을 스스로 찾아가면서 반복숙달하는 것이 무작정 느리게 연습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한편, 이렇게 템포 때문에 골머리를 싸매는 우리의 현실 가운데는 의외로 간과된 불편한 진실이 있다. 이름만 대면 다 알고, 연주회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아닌 이상 피아노를 친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바, 느린 곡을 제대로 연습해 본 기억이 거의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정곡을 요구하는 수준높은 학교든, 베토벤 소나타와 쇼팽 에튀드 중 한 곡을 요구하는 대다수의 학교든 입시곡으로 쓰이는 곡들을 떠올려보자. 십중팔구가 아니라 거의 100퍼센트 빠른 곡을 요구한다.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입시시험이든 실기시험이든 원래 템포가 빠른 곡을 그것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치면 높은 점수를 받는 데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소나타 전악장을 보는 시험도 마찬가지다. 느린 악장? 거의 100퍼센트의 확률로 (악보기준) 한두 줄 듣고 종을 땡 쳐버린다. 졸업연주에 가보면 이 상황의 끝판왕이 온다. 선곡표를 보면 이건 뭐 “우당탕탕 배틀”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걸 보면서 든 생각이 있다. 왜 느린 곡을 제대로 음미하면서 칠 기회 자체가 잘 주어지지 않는 걸까? 느린 곡이 없는 것도 아니다. 베토벤 소나타 32곡의 느린 악장들만 싹 모아 들어보자.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고 서정적인 보석같은 곡들이 많다.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8번 비창 소나타의 2악장 아다지오 칸타빌레를 예로 들어보자. 이 아름다운 한 악장은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음대의 연습실에서는 들어볼 기회가 상당히 드물고, 오히려 취미생들에게서 정말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곡이다. 이건 하루 대여섯 시간을 피아노 앞에 붙어 있는 음대생들보다 퇴근 후 피아노를 치러 오는 직장인의 손끝에서 더 세련된 감성과 아름다운 소리를 맛볼 수 있을 확률이 더 크다는 얘기도 된다. 


https://youtu.be/dYzOTBsGi74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op.13 중 2악장 Adagio cantabile

조성진, 피아노


 여기서 바로 문제제기는 출발한다. 느린 곡들을 한 번 제대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행이라는 자세로 말이다. 느린 곡들을 연습하는 행위의 효과는 의외로 정말 크다. 레슨에 들어가면 항상 선생님들은 “본인의 소리를 스스로 들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쉽지, 절대로 쉬운 게 아니다. 눈과 손이 정신없이 악보 따라간다고 바쁜데 어느 천년에 스스로 들으면서 연습하겠는가. 뛰어난 축구선수는 자신이 공을 받기 직전 순간적으로 좌우로 고개를 돌려 동료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 공을 받아 다른 선수에게 패스를 할지, 드리블로 치고 나갈지, 슛을 때릴지 선택하는데, 이것은 축구의 가장 어려운 테크닉 중 하나라고 한다. 전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을 역임한 박경훈 감독은 현재 K리그 최정상급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윤빛가람 선수를 중용한 이유를 단 한 마디로 밝힌 바 있다. “당시 내가 본 선수들 중 고개를 돌릴 줄 아는 유일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피아노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치는 소리를 자신이 들을 줄 알아야 실력이 는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하기에는 정신없는 빠른 곡보다는 느린 곡이 당연히 유리하다. 물리적인 시간에서부터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느린 곡에 나오는 코드 한 개, 패시지 한 개를 스스로 소리를 들어가며 조탁하는 행위는 일단 맛이 들리면 참 재미있다. 루즈한 텐션으로 처지기 쉬운 기분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이런 연습은 언뜻 테크닉 향상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여길 수 있는데, 이건 정말 근본적으로 틀린 이야기다. 본래 테크닉과 음악성은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실과 바늘처럼 같이 간다고 봐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다 보면 거기에 맞는 테크닉이 자동으로 따라온다(물론 기계적으로 즉각 따라오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따라오는 것은 100퍼센트다). 느린 곡에서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만드려고 애썼던 그 메커니즘을 빠른 곡에도 똑같이 적용시켜 보는 것은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리히터와 길렐스를 키워낸 러시아의 전설적인 피아노 레스너인 네이가우스는 “음악적 확신이 높을수록 기교적인 어려움은 줄어든다”고 말한 바 있다. 이떄 느린 곡을 연습해보는 것은 네이가우스가 말한 음악적 확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본다! 반면 빠른 곡을 연습할 때면 테크니컬한 부분을 좀더 세밀하게 다듬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절대로 나만의 뇌피셜이 아니다. 작곡가들이 빠른 악장과 느린 악장을 골고루 섞어서 소나타나 모음곡을 쓰는 것은 절대로 현학적인 행위가 아니고, 큰 틀에서 하나의 유기체로 세팅한 다음 곡을 쓰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자면, 빠른 악장에서 세밀한 손가락의 테크닉의 영역에 무게중심을 두고, 느린 악장에서 소리의 조탁, 풍부한 표현 등의 음악성의 영역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완성 과정에서 그것을 합치는 것이 정석이라는 것이다.

https://youtu.be/8G8-rl_19BI

슈만 : 판타지 C장조 op.17 중 3악장

클라우디오 아라우, 피아노


 느린 곡을 제대로 연습하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음악적 성장을 가져다 준다. 내 경우에도 그랬다. 졸업 리사이틀의 메인 프로그램에 넣은 슈만의 판타지는 마지막 악장이 지극히 느린 템포와 섬세하고 애절한 감성으로 무장한 곡이다. 이 마지막 악장을 통해 엄청난 것을 스스로 배웠다. 짙고 끈끈한 레가토, 너무나 세심한 피아니시모의 표현, 각기 다른 느낌으로 표현해야 하는 프레이징마다의 리타르단도 등등….나중에는 1,2악장의 어려운 테크닉에 막힐 때 중단하고 3악장을 연습한 뒤 다시 돌아오면 앞 두 악장의 테크닉적인 난점들이 씻은 듯이 풀리는 체험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피아노 앞에 앉아 열심히 피아노와 씨름하는 사람들이여! 느린 곡들과 조금만 더 친해져 보자. 굳이 애써 따로 찾을 필요도 없다. 현재 연습하는 소나타나 모음곡, 변주곡 안에 들어 있는 느린 악장들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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