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율로 손풀기와 연습 두 마리 토끼 잡기
나는 학부를 거치지 않고 대학원만 피아노과를 졸업했기 때문에, 학부를 거친 사람들처럼 쌓여 있는 데이터가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학부에 입시시험을 거쳐 들어간 사람은 누구나 자다 일어나도 친다는 쇼팽 에튀드 한 곡도 완성해본 것이 없고, 바흐 평균율을 깊이 공부해 본 적도 없었다. 이거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좌충우돌로 곡을 외우고 만드는 데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섬세함과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바흐 :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전곡
안드라스 쉬프, 피아노
그러던 와중, 내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나에게 레슨을 받는, 바흐를 너무나 좋아하는 취미생 한 사람이 “바흐 평균율을 다 쳐보고 싶다” 는 폭탄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흔쾌히 OK를 외쳤다. 누군가에게 배우는 것도 좋지만 내가 가르쳐 가면서 배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어떤 공부이건 누군가에게 가르칠 때 본인이 가장 많이 배운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가르칠 수는 없다. 내가 공부해야 했다. 그래서 방법론을 고민해보았다. 일단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의 연습방법을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부지런히 찾았다. 그러던 중 눈에 번쩍 뜨이는 문구가 하나 있었다.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학생 시절 날이면 날마다 바흐 평균율의 모든 곡을 심지어 모든 조로 바꿔 가면서 연습했는데, 이것이 훗날 자신의 연주의 밑천이 됐다고 회고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여기서 방법을 약간 바꿨다. 모든 조로 이조해서 치는 것은 어려우니, 그렇다면 그날 연습할 곡과 같은 조의 평균율을 골라서 손풀기용으로 쳐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예를 들면 C장조인 베토벤 발트슈타인을 연습할 때는 평균율 1권의 1번 또는 2권의 1권의 프렐류드를 손풀기용으로 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흐 평균율도 한두 곡을 빼면 거의 쳐보지 않은 곡들이었다. 일단 메트로놈을 켜놓고 천천히 쳐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았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템포를 올려 내가 가장 편하게 칠 수 있을 정도로의 템포로만 맞춰 놓고 친다. 이러한 방법으로 프렐류드를 쭉 쳐 나가기 시작했다. 운동으로 치자면 스트레칭이 확실히 되는 느낌이다. 운동을 할 때도 전신 운동이 특정 부위만 공략하는 운동보다 몸에 좋듯이, 바흐 평균율은 오른손 뿐만 아니라 왼손을 활성화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주선율이 양손을 정신없이 왔다갔다할 뿐만 아니라, 성부들을 옮겨다니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천천히 치면서 손을 푸는 재미가 있다. 이렇게 손풀기용으로라도 치는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음악적 표현도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될 것이고, 템포도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겠는가? 그 재미가 참으로 쏠쏠하다. 문자 그대로 “손가락 활성화” 작업이다. 손 푸는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제, 대선율, 병진행 등을 살려 치기 위해서는 머리도 활성화를 시켜줘야 한다.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배우는 국민체조는 어느 정도는 다른 운동을 하기 위한 준비운동의 성격이 있는데, 이 국민체조도 올바른 동작으로 절도 있게 했을 때 상당히 멋있어 보이듯이 비록 바흐 평균율을 손풀기용으로 치더라도 그 과정에서 좀더 잘 치게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무대에 올려도 될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져 본다. 이미 평균율이라는 이 세트 자체가 건반음악의 구약성서라 일컬어질 만큼 완벽하게 만들어진 음악 아닌가!
바흐 :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2권 전곡
안드라스 쉬프, 피아노
피아노 연습을 할 때, 손을 푸는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농을 처음부터 끝까지 쳐보기도 하고, 쉬운 곡들을 가볍게 치면서 손을 풀기도 하며, 스케일과 아르페지오로 손을 풀기도 한다. 모두 나름의 장점이 있는 방법들이다. 나도 모두 시도해 봤지만, 바흐 평균율을 이용해서 손을 푸는 것만큼 효과적이면서 효율적인 방법은 없다고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손풀기용으로 출발했더라도, 점차 평균율 한 곡씩 익혀 나감에 따라 그대로 그것이 내 연주 레퍼토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비교불가한 장점이다. 앞서도 언급한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아라우의 사례 외에도, 쇼팽은 제자들에게 연습을 시작하면 반드시 바흐 평균율을 치라고 권했다고 한다. 바흐 평균율 전곡을 모두 쳐보고 싶다는 “폭탄선언”을 한 레슨생에게 오히려 내가 더 고마워진다. 어떤 곡을 치든 평균율로 손을 푼 상태로 연습을 한다면 뭔가 좀더 수월하게 되겠다는 확신이 생겼기에! 취미로 쳐도 리스트 라 캄파넬라나 메피스토 왈츠,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떡 주무르듯이 쳐내는 사람들에게도 손 풀 때는 바흐 평균율을 가까이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분명 음악이 달라지고 치기가 수월해지는 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