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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Dec 25. 2019

헨델과 바그너, 음악은 너무 좋은데...

마치 두꺼운 스테이크를 먹은 것처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베토벤은 모차르트에 대해 의외로 호불호가 갈렸다고 한다. 일단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매우 높이 평가했고 무한히 존경했다. 특히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듣고서는 “나 같은 놈은 때려죽여도 이런 곡은 못쓴다”는 말을 남겼으며, 이 곡에 자신이 직접 카덴차를 정성스럽게 써서 붙였고, 오늘날까지도 이 곡에 가장 널리 쓰이는 카덴차는 베토벤의 버전이다(이러한 이유로 때로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합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주력 분야였던 오페라는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대해 가진 견해는 “저 좋은 음악을 왜 저런 저속한 소재에 갖다 붙인 건가?”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또한 저 두 거장은 음악관도 달랐다. 모차르트가 짧은 아티큘레이션과 우아함을 강조했다면, 베토벤은 유려한 레가토를 강조했다. 요약해 보면 저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성은 120퍼센트 인정했다. 그러나 분명 두 사람 모두가 서로의 음악에 일정부분 불편함을 느낀 부분은 있어 보인다.

https://youtu.be/ZuGSOkYWfDQ

헨델 : 메시아

콜린 데이비스, 지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런 베토벤의 마음이 나도 이해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헨델과 바그너를 들을 떄다. 일단 지금 시즌이 시즌이니만큼 뒤돌아서면 라이브로 볼 수 있는 헨델의 “메시아”를 예로 들어 보자. 뭐 이 대곡의 명성이야 재론할 필요도 없다. 음악 자체는 정말 말할 수 없이 좋다. 더군다나 연주 시간이 두 시간 반 가까이 되는 이 거대한 곡을 헨델은 불과 3주만에 써제꼈다. 가히 모차르트도 능가하는 엄청난 스피드다. 그것도 성치도 않은 몸으로! 특히 2부 막판에 나오는 저 유명한 “할렐루야 코러스”의 그 미친 듯한 환희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문자 그대로 신이 불러주는 음악을 그냥 받아쓰기한 신들린 음악이라는 표현이 딱 맞다. 그런데 이 환희에 찬 2부가 끝나고 이어지는 3부의 느낌은 내게는 적지 않은 허무함이 밀려오는 감이 있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감정은 바로 헨델의 인생에 그 뿌리가 있다. 헨델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출세지향적인 사람이었다. 평생 교회와 궁정, 가정밖에 몰랐던 동갑내기 바흐와는 캐릭터의 결이 달랐다. 당연히 헨델은 평생을 돈방석에 올라앉아 살았던 호인이었고(물론 “메시아”작곡 당시에는 방탕한 생활과 오페라 가수 출연료 문제 등으로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지만), 지금이야 평가가 역전되었지만 당시의 헨델은 바흐와 비교할 수 없는 명성 속에서 살다 간 인물이었다. 동갑내기 헨델을 존경한 바흐는 헨델을 꼭 만나고자 했지만, 헨델은 바흐의 그런 움직임을 “웬 듣보잡이 날 보러 오나?”는 식으로 넘겼다고 한다. 거기다가 헨델의 저 유명한 수상음악 일화(자신이 독일에서 모시던 주군이 자신이 귀화한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자, 수상음악을 써서 위기를 모면한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요즘으로 치자면 20년차 직장인들도 가볍게 능가하는 기막힌 처세술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사회생활 잘 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예술가로서의 헨델의 이러한 면에 적잖은 거부감을 느낀다. 바그너도 마찬가지다. 헨델과 마찬가지로, 바그너도 음악을 들을 때는 정말 기가 막히게 좋다.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넘치고, 그 음악들이 뿜어내는 음향은 정말 찬란하게 번뜩인다. 바그너의 역작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바그너가 구사한 “트리스탄 코드”라고 불리는 그 획기적인 화성법의 희열이란 결코 자주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나는 시도해보지 않았지만, 바그너의 작품만을 장기간 공연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10년씩 번호표 뽑아 기다린 다음 가는 사람들도 있을 만큼 바그너의 음악에는 사람의 본능적인 감성을 극단적으로 자극하는 매력적인 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바그너 역시 인성적인 면에서 늘 내 마음을 편치는 않게 만드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방탕한 사생활로 엄청난 부채를 떠안으며 온 유럽을 떠돌아다녔고, 나이가 좀 들어서는 자신의 수제자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이자 친구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를 빼앗았으며, 그 외에도 유부녀를 골라 불륜을 저지르는 정도는 바그너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행위였다. 그 뿐인가? 자신의 음악에 반해 국정을 등한시하면서까지 자신을 후원해준 바이에른 공국의 군주 루드비히 2세에게도 바그너는 안하무인이었다. 그리고 바그너는 유대인의 혈통을 가졌다는 이유로 멘델스존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인물이었으며, 실제로 음악계에 발표한 한 논문 “음악에서의 유대정신”을 통해 멘델스존을 아예 작정하고 까버리기도 했다. 또한 그의 가극들이 품고 있는 소재는 독일의 신화들이 대부분인데, 이것이 바그너 사후 히틀러라는 희대의 미친 놈이 나와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선전도구로 쓰이는 운명을 맞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헨델은 본인이 출세지향적인 인물일 뿐이었지, 대외적으로 악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은 아니었던 반면 바그너는 자신의 행동이 주위에 미치는 부정적인 파급력이 대단히 강했다는 점에서 짚고 넘어갈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렇기에 그의 음악을 들을 때도 마음 속에서 간간이 올라오는 찝찝한 기분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헨델과 바그너, 뭔가 계륵 같다. 음악이 너무 좋아 안 듣기엔 아쉽지만 또 듣고 나면 뒷맛이 영 개운치가 못하니까. 이 두 사람의 주력이 피아노곡이 아닌 건 천만다행(?)이다. 그들이 피아노곡을 대거 남겼다면, 내 성격상 “이걸 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는 딜레마가 생길 곡들이 한두 곡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https://youtu.be/iTKTV0c7Cno

바그너 :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뭐 내게 있어 헨델과 바그너, 이 두 사람은 질 좋은 소고기로 맛있게 구워진 두꺼운 스테이크 정도에 비유할 수 있겠다. 좋은 스테이크는 먹을 때 참 맛있지만, 먹고 나면 영 속이 더부룩하고 편치 않을 때가 많은 것처럼 말이다. 정답까진 아닐지 모르지만, 나는 헨델과 바그너를 들을 때는 꼭 디저트처럼 바흐나 모차르트, 슈만, 브람스를 뒤에 이어서 듣곤 한다. 감동을 아름다운 여운으로만 남기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뒷처리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찌 됐든 결론은 우리는 남겨져 있는 음악들의 예술혼만 제대로 즐기면 될 일이다. 그런데 헨델과 바그너에 한해서는 그게 쉽지많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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