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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Jan 04. 2020

체르니, 이 양반이 신이야?

피아노가 꼴도 보기 싫어지게 만들고 싶어??


 생각하기에 따라 좀 극단적이랄 수 있는 워딩이긴 하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체르니”라는 단어를 들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 극도의 혐오감을 느낀다. 온라인의 아무 피아노 커뮤니티나 가보면 꼭 이런 질문이 눈에 띈다. "체르니 40번 다 끝냈는데 베토벤 월광 소나타 칠 수 있을까요?" 같은 거. 그뿐만이 아니다. 친구들과 만담을 나누다가 피아노 이야기 나오면 십중팔구는 "나 체르니 xx번까지 쳤어" 이런 얘기가 훈장처럼 나온다. 이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솔직히 땅이 꺼져라 한숨이 나온다. 이 나라에서 체르니가 무슨 자격증이라도 된 건가? 충분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시간을 어린 시절로 되돌려보면, 나는 비록 너무나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들 사이에서 말도 별로 없었고 같이 다니는 친구도 거의 없었지만, 유독 피아노 학원만 가면 하이텐션으로 급변하는 아이였다. 더군다나 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은 동네 아이들은 죄다 모였던 곳이라, 나랑 친하게 지내던 몇몇 친구들은 학원에서의 내 모습과 학교에서의 내 모습이 180도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쉽게 말해 피아노 학원만 오면 골목대장으로 변신하던 것이 나라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 학원에서는 입시를 준비하는 누나들이 꽤 있었는데, 내 연습과 레슨을 마치고도 학원에 남아 그 누나들이 연습하고 레슨하는 장면을 뒤에서 말없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 바람에 누나들이 크게 당황했던 에피소드도 있다. 그렇게 웬만한 입시곡들은 귀로 들어 거의 외워버린 상태였다. 누나들의 연습장면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치는 베토벤 소나타들, 쇼팽 에튜드, 그리고 갖가지 고전 낭만 작품들을 귀에 깨알같이 담으면서 늘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언젠가는 저 멋진 곡들을 꼭 내가 직접 치리라!


 그러나 그 길은 곧 암초에 부딪히게 되었다. 분명 또래들보다 잘 친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내 앞에 놓여있던 악보는 늘상 체르니였다. 그래도 체르니 30번까지는 할 만했다. 알고 보니 그 “허니문 기간”은 옆의 친구들보다는 상대적으로 긴 편이었다. 체르니 30번에 오자, 불과 전날까지 내 옆방에서 피아노를 뚱땅거리고 있던 친구들이 하나 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갔다. 다만 나는 같이 배우는 소나티네나 소나티네를 마친 후 들어가는 모차르트 소나타를 치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 버티고 있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체르니 40번을 마주한 순간, 철옹성 같은 거대한 벽이 느껴졌다. 당시의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어렴풋이 “이 무의미하고 무식한 짓을 꼭 해야 하나?”는 생각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했다. 슬럼프가 왔다. 결국 큰 마음을 먹고 부모님께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는데, 부모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오케이 사인을 던지셨다. 사실 여기까지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초등학생들과 엄마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그런데 근본적이고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이미 많은 음악들을 귀에 입력시켜 둔 상태였지만, 내 마음속에 정말 어이없는 도그마가 굳게 형성되어 있었다. “체르니 40번도 못 끝낸 놈이, 저 곡들을 어떻게 감히 칠 생각을 하겠는가?” 따위의 어이없는 도식 말이다. 그렇게 이미 있는 음악을 음반으로 열심히 듣기만 하면서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갔는데, 군대에 가기 직전 봤던, 당시 아직 10대였던 손열음 씨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의 영상이 나에게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 가녀린 10대 소녀가 힘이 넘치는 이 난곡을 너무나 쉽게 쳐내버리는 것을 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난 스무 살이 넘도록 뭘 하고 있었는가?”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입대가 일 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내가 전공의 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셨던 그 학원의 원장님을 무작정 다시 찾아갔다. 원장님은 날 보자마자 “나는 니가 다시 찾아올 줄 알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있는 한 발걸음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진지하게 다시 시작하는 결단을 최종적으로 내리기까지는 이 때로부터 또 10년이 더 걸렸다. 본래 의사결정을 쉽게 하지 못하는 내 성격 탓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존재했다. 역시 체르니였다. 사실상 그 10년의 기간 동안 나를 괴롭힌 건 여전히 “체르니 40번도 다 못 끝낸 놈이 어떻게 베토벤 소나타와 쇼팽 에튀드를 쳐내겠는가”라는 흡사 종교처럼 굳어져 버린 고정관념이었던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을 깨는 데는 역시 그 원장님께 레슨을 받고 6개월 만에 속성으로 음대에 합격했던 어떤 일반고 고3 남자 아이의 선례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그 입시생은 체르니 100번도 떼지 못한 상태였고, 악보도 제대로 읽을 줄 몰랐다. 그에 비하면 나는 상대적으로 나은 상황이었다. 적어도 악보 못 읽어 버벅대는 건 없었고 초견 좋다는 이야기는 적지 않게 들었었으니까. 그리고 귀로 들은 정보만큼은 어딜 가도 빠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으니까. 그렇게 시작한 대학원 입시는 앞서 언급한 남고생의 그것의 절반인 단 3개월의 불꽃 해피앤딩으로 마무리됐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나의 이야기는 내가 이만큼 능력이 있다는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체르니의 폐해를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3개월의 레슨 기간 동안 내가 정말 피부로 명확히 느꼈던 것이 있다면, 피아노를 치는 사람의 열 손가락은 음악적 청사진에 어떻게든 딸려 가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큰 틀을 파악한 다음 세부 프레이즈들과 아티큘레이션의 의미를 상고하다 보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사람의 열 손가락은 가슴과 뇌의 오더 없이 절대로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다. 이를 네이가우스도 지적한 바 있다. “음악적 확신이 높을수록 기교적 어려움은 줄어든다”. 이 발언은 피아노 연주의 진리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런데 체르니 100-30-40-50으로 이어지는 소위 말하는 통념적인 이 훈련과정은 앞서 말한 저 명제를 정면으로 부정해버리는 모순이 존재한다. (약간의 주관이 가미된 견해이기는 하지만) 저 연습곡집 중에 한 곡이라도 체르니가 요구하는 인템포와 악상지시를 모두 지켜서 연주해 보면, 정말 음악적인 감성은 1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로지 기계적인 패턴의 반복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을 차례대로 한 곡도 빠짐없이 다 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행위다. 피아노 학원에서 저 과정으로 배울 때, 아마 100명 중 99명은 그냥 느리게라도 완곡을 하면 계속 다음 곡으로 패스하면서 나갈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만 해도 고역이고 사람 엿 먹이는 중노동이다.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가 없는데 여기서 무슨 재미를 느끼겠는가. 연습곡, 즉 에튀드의 영역이라면 체르니를 제껴놔도 이미 고도의 예술성까지 가미되어 듣는 이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곡들이 수도 없이 많다. 저 유명한 쇼팽의 에튀드부터 시작해서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모슈코프스키, 드뷔시 등에 이르기까지 이 에튀드들만 다 쳐보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모자른다. 음악이란 게 본질적으로 예술의 영역인데, 저 보석 같은 곡들을 다 놔두고 기계적인 패턴반복밖에 없는 체르니를 금지옥엽처럼 받들어 모신다? 지나가는 동네 똥개도 박장대소할 일이다. 


 물론 테크닉 연습은 어떻게 하느냐는 반문이 들어올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이건 반박하기 대단히 쉬운 영억이다. 유명한 작곡가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어려운 곡만을 쓰지는 않는다. 짧고 쉽고 아름다운 소품들도 수도 없이 많다. 사람들을 들었다 놓는 현란한 테크닉들은 사실 기초 테크닉들의 합집합의 개념인데, 이러한 기초 테크닉들은 쉬운 소품들(바흐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노트, 25개의 부르크뮐러 연습곡, 쿨라우나 클레멘티의 소나티네, 그리그 서정 소품집, 쇼팽 마주르카,슈만 어린이를 위한 앨범 등등)에서 차고 넘치게 익힐 수 있다. 이러한 곡들은 기본적으로 음악성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음악의 흐름에 따라 테크닉을 자연스럽게 익히기에는 훨씬 더 용이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기초 테크닉이 어느정도 습득이 되면 바흐 인벤션과 평균율을 손풀기용으로 매일 치면 너무나 좋다. 실제로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학생 시절 바흐 평균율의 모든 곡들을 각각 모든 조로 이조해서 매일 쳤던 경험이 자신의 연주력의 밑천이 되었다고 회고했던 바 있다. 여기다 좀더 화려한 테크닉을 장착하고자 한다면 쇼팽,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에튜드들을 한 곡씩 골라 꾸준히 치면 금상첨화다. 


 결론은 체르니가 만능 키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음악사에 남은 그의 업적을 폄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체르니 100-30-40-50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은 절대로 체르니가 의도한 바대로 짜여진 프로세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엽기적이게도, 이러한 커리큘럼의 진원지는 본고장 유럽이 아닌 옆나라 일본이다!). 저 곡집별로 다양한 용도가 있고, 그것을 체르니가 명시해 놓았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체르니를 피아노를 배우는 과정에서 배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꼭 써야 한다면 저자인 체르니의 의도에 맞게 쓰는 것이 옳다. 이를테면 어떤 곡을 연습하다가 테크닉적으로 막히는 부분이 나왔을 때 그것을 연습하는 용도로 선택적으로 골라 쓰는 식으로 말이다(다행히 체르니는 다양한 용도의 연습곡을 체계적으로 다 써 놓았다). 체르니를 신봉하는 행위, 특히 무식하게 100-30-40-50으로 초지일관 가는 커리큘럼은 지금 당장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수많은 재능 있는 아이들이 되레 피아노가 꼴도 보기 싫어지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더이상 목도하고 싶지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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