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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Jan 04. 2020

아라우를 진작 많이 들었다면...

뒤늦게 찾은 나의 지향점

 20대 시절 우연히 구입한 한 장의 음반이 나에게 엄청난 분노를 남겼다. 내용물은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콜린 데이비스가 이끄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5번. 분명 평이 좋아 산 음반인데, 내가 듣기엔 영 아니었다. 늘어지는 템포에 미스터치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그 와중에 반주부는 묵직하니 아주 좋았다). 아라우 같은 대가가 이렇게 허접하게 칠 리가 없겠다 싶어 또 들어봤지만 받는 느낌은 같았다. 그 이후 한동안 아라우라는 이름은 솔직히 말해 나의 “블랙리스트”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몇 년 지난 후, 그가 연주한 쇼팽의 녹턴을 듣고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개인적으로는 이구동성 최고의 명연으로 칭송하는 루빈스타인의 연주보다 더 좋았다. 그 이후 아라우의 쇼팽 녹턴은 꽤나 애청음반이 됐지만, 내게 아라우의 이미지는 “서정적인 곡만 잘 치는 재미없는 피아니스트”로 굳어 있었다. 

https://youtu.be/uUdoxvigIl8

쇼팽 : 녹턴 전곡

클라우디오 아라우, 피아노


 그런데 피아노를 전공하기 시작하고 나의 색깔을 찾는 과정이 지속되면서, 큰 그림으로 보아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은 외적인 화려함보다는 깊이를 추구하는 쪽이었다.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이 이구동성 그런 쪽으로 얘기하셨고 받는 곡도 그런 쪽으로 받았다. 내가 치는 곡들은 늘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슈만 이렇게 다섯 사람 범위내에서만 놀았다. 자연스럽게 깊이있는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들에게 좀더 손이 더 가게 되었다. 20대 때 재미없게 여기던 쉬프, 브렌델, 켐프, 루푸, 부흐빈더 같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가 가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독일-오스트리아계 고전, 낭만 작품들에 강점이 있는 피아니스트들인데, 그들이 뿜어내는 난로 같은 따뜻한 소리와 정갈한 해석, 섬세한 감성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가슴으로 다이렉트로 다가오는 뭉클한 뭔가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라우를 다시 맞딱뜨렸다. 그것도 오래 전 내가 그토록 실망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에서!


 분명 15년 전에 멘붕이 올 정도로 실망했던 그 연주와 똑같은 연주다. 그런데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의 오프닝은 솔로부터 들어가는데,. 아라우가 누르는 첫 G장조의 1도화음부터 “자, 지금부터 많은 얘기를 풀 준비가 되어 있으니 잘 들어보시오”라고 말하는 듯 운을 신비스럽게 띄운다. 그리고 프레이징 하나하나에 정말 눈부신 레가토를 먹이기 시작한다. 점점 그의 느린 템포가 응당 그리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내가 현실에 있는 것인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모를 환상적인 소리의 향연이 끝없이 쭉 펼쳐진다. 미스터치?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렇게 40분을 넘게 이어지던 꿈결 같은 소리의 축제가 끝나자, 나는 아예 달리던 차를 멈추고 뜨거운 박수를 쳤다. 그리고 찾을 수 있는 아라우의 음원들을 닥치는 대로 휴대폰으로 모두 다운받았다. 그리고 흥분된 마음으로 이것저것 다 찾아 들었다. 슈베르트고 슈만이고 베토벤이고 쇼팽이고 브람스고 리스트고 모차르트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밤새 아라우의 음원들을 들은 뒤 망설이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지향해야 할 바는, 아라우처럼 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https://youtu.be/rvdEjg-EDTk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4번 G장조 op.58

클라우디오 아라우, 피아노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아닌 게 아니라, 내가 늦깎이로 피아노를 다시 치면서 서서히 잡아갔던 나의 방향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피아니스트가 아라우였다. 음악에 풍부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템포를 늦추기도 하고, 아무리 포르티시모로 꽝꽝거리는 구간에서도 결코 무작정 때려서 치는 법이 없으며, 한 음의 소리를 만들기 위해 정말 다양한 터치와 페달링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냥 느껴졌다. 그렇다고 내가 20대 시절에 느낀 것처럼 테크닉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아라우가 구사하는 테크닉은 가장 고도의 테크닉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그저 미스터치 없이 손 잘 돌아가는 게 테크닉의 완성이 아니라 작곡가가 원하는 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테크닉이 진정으로 완성된 테크닉인 법인데, 아라우는 음 하나하나에서 그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아라우 연주의 힘은 미스터치를 냈다 하더라도 그것을 불과 1초 뒤에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음악적인 몰입도와 통찰력이 극히 높다는 것에 기인한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인문학적 통찰력이 뛰어났고 많은 독서량을 자랑했으며 조국 칠레가 독재정권의 치하에 놓이자 고국에서의 연주를 거부하기도 했을 정도로 정치적으로도 소신이 있었던 그의 인성이 만들어내는 부분도 있다. 스스로 부끄러웠다. 레슨을 받으면서 제발 좀 때리지 말라고 지적받을 때가 대체 몇 번이었던가. 마음으로 피아노를 치라는 지적을 받을 때 또한 몇 번이었던가. 지금 받은 이 절대적인 감동을 20대 시절에 느낄 수 있었더라면, 일찌감치 아라우의 음악에 귀가 길들여져 있었더라면 레슨 때마다 그런 지적은 안 받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어느 순간 피아노를 “예쁘게 치는”것이 고수임을 스스로 깨달은 바 있다. 그런데 아라우는 여기에 또다른 것을 보너스로 안겨줬다. 묵직하고 뼈대 있는 소리를 내면서도 그 안에 예쁜 소리를 충분히 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물론 마리아 주앙 피레스나 미츠코 우치다, 엘렌 그뤼모처럼 문자 그대로 예쁘게 소리를 잘 내는 피아니스트는 많다. 하지만 아라우는 그 위에 묵직함까지 장착한, 정말 득음의 경지에 이른 소리를 맛보여 준다.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여간한 노력으로는 될 일이 아니다. 어쩌면 평생을 가도 못 이룰 경지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향성은 아라우처럼 소리내는 것으로 잡고 노력해 나가고자 한다. 아라우가 이룬 그 경지의 딱 10%만 달성해도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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