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마드뮤지션 Jan 14. 2020

빌드업, 베토벤의 필살기

빌드업으로 말하는 베토벤 사용설명서



 빌드업이란 단어는 최근에 축구에서 많이 쓰인다. 특히 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벤투 감독은 후방 빌드업 전술을 초지일관 고수한다. 이 전술의 특징은 가장 뒤에 있는 골키퍼부터 차근차근 패스로 공을 이동시켜 상대방의 적진까지 침투한다는 것이다. 이 전술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기본적으로 골키퍼는 공 막는 데만 집중하고, 수비수는 수비하는 데만 집중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골키퍼도 필드 플레이어처럼 패스할 수 있어야 하고, 수비수도 공격 가담을 할 줄 알아야 하며, 최전방 공격수도 열심히 수비를 해야 한다. 그런 만큼 난이도가 높은 전술이다. 대신 잘 되면 정말 보는 눈이 즐거운 수준높은 축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축구에서 말하는 빌드업의 목적과 목표를 음악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작곡가가 있으니, 바로 베토벤이다. 베토벤이 악성으로 일컬어지는 상당히 큰 지분이 이 빌드업이라는 개념이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음악적 용어로 다시 쓰면 “주제 전개”라고 한다. 악식론의 개념으로 설명하면 정말 한도 끝도 없고 생소한 용어들 때문에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이것을 축구의 빌드업에 비유해 보면 정말 이해가 쉬워진다. 우선 큰 틀에서 베토벤의 작품 목록 중 일부를 뽑아내 보자. 작품 31번으로 묶여있는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16,17,18번)과 그 이후에 작곡된 21번 소나타 “발트슈타인”을 예로 들어보자. 작품 31에 해당하는 세 개의 소나타는 각각의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16번 G장조는 우아하고 고전적이고 해학적인 악상을 품고 있다. 리듬도 아주 정석적이고 엣지있게 돌아간다. 반면 이어지는 17번 d단조 “템페스트”는 앞 곡 16번과는 완전히 다르게 낭만적이고 신비스럽고 자유로우며 미스테릭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말이 소나타지 판타지라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이렇게 극히 상반된 세계를 보여준 베토벤은 이어지는 18번 Eb장조 소나타에서 악장을 네 개로 늘리고 앞의 두 곡의 장점들을 골고루 섞어 정반합의 결론을 낸 느낌의 곡을 만들어 냈다. 이런 흐름은 21번 C장조 “발트슈타인”에 가서 진정한 베토벤다운 무시무시한 결과로 귀결된다(19번과 20번은 젊은 시절 미리 작곡해 놓은 곡이 번호만 붙은 것이므로 이 흐름에 예외로 둔다). 앞선 세 곡에서 스스로 얻은 성과들이 또다른 차원의 창조력으로 승화되어 있다는 것이 그냥 느껴진다. 치열한 빌드업 끝에 눈이 휘둥그래지는 슈퍼골이 나온 셈이다(마치 아래 동영상의 2006 월드컵 아르헨티나-세르비아전에서 수십 번의 패스 끝에 나온 캄비아소의 슈퍼골처럼). 그리고 이러한 무시무시한 결과물이 23번 f단조 “열정”에서 다시 한 번 나온다! 

https://youtu.be/COe5Y29-BZY

  2006년 독일 월드컵 조별예선 C조 아르헨티나vs 세르비아전 캄비아소 골


https://youtu.be/dL0JLNt_3EE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21번 C장조 op.53 "발트슈타인"

클라우디오 아라우, 피아노



 작품의 흐름 뿐만이 아니다. 각 곡들의 내용물을 살펴보아도 베토벤의 핵심 키워드는 전개력이라고 불리는 “빌드업”이다. 당시로서는 말도 안되는 큰 규모 때문에 당대의 빈 음악계가 핵폭탄급 충격을 받았다는 저 유명한 영웅 교향곡은 알고 보면 쓰고 있는 주제들은 그 전 작품들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심플하고 깔끔하다. 단지 1악장의 발전부에서 보여주는 말도 안되는 스케일의 빌드업과 피날레에서 보여주는 혁명적인 주제 변주의 기법이 이렇게 종전의 작품들과 극적인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피아노 협주곡으로 넘어가 보면 이것은 더욱 노골적으로 딱 보인다. 언뜻 듣기엔 상대적으로 단순해 보이는 1,2번이 악보를 보면 오히려 더 구조적으로 복잡해 보이고, 베토벤의 색깔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3번 이후의 피아노 협주곡들의 경우 이 음악이라는 전체집합을 이루는 원소(주제, 패시지들)들은 자세히 보면 이거 귀찮아서 대충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순하기 짝이 없다(사진으로 볼 수 있는 베토벤의 지독한 악필이 담긴 자필악보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모차르트나 쇼팽처럼 주제부터 귀에 쏙 박혀 바로 외울 수 있을 것만 같은 존재감 확실한 멜로디 따위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순한 재료들을 가지고 갖고 노는 말도 안되는 빌드업이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 특히 협주곡 4번과 5번을 비교해 보면 정말 놀란다. 이 두 곡은 그냥 듣기만 해서는 각각 다른 사람이 썼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곡으로 들리는데, 악보를 펼쳐놓고 보면 전개 방식이 거의 복사판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유사하다. 두 곡 모두 치밀한 빌드업을 구사하고, 듣기에 그렇게 큰 차이점을 만드는 것은 두 곡 사이에 살짝씩만 다른 다이내믹, 악상지시 따위들이다. 이 정도 되면 확실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베토벤의 키워드는 “빌드업”이라는 것이다! 이것만 이해하면 베토벤의 큰 틀은 확실히 통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https://youtu.be/e8OeXFvCph4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아르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피아노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지휘

빈 심포니


 피아노를 치는 나도 늘 베토벤을 가까이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 “빌드업”이라는 대명제 아래 모든 디테일한 방법론이 다 들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 또한 차곡차곡 찾아가는 재미가 있을 듯하다. 베토벤의 험난한 인생을 생각해 봤을 때 “고난과 싸워 이긴 인간승리”등의 워딩으로 표현하는 것이 결코 틀린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이렇게 표현하기엔 뭔가 너무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베토벤은 이러한 고난을 거쳐 치밀하고 체계적인 빌드업을 자신의 주무기로 정착시켰으니, 이것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나 싶다. “빌드업” 이라는 단어 한 개로 베토벤을 포괄적으로 논할 수 있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념차이는 아무것도 아닌 음악적 견해의 차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