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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Jan 18. 2020

"귓병 뽕"에 눌려버린 베토벤 초기작의 안타까운 존재감

한 상 가득 차려진 채식 같은 음악들



 주위에서는 예전에 비하면 본인의 소신에 의한 채식주의자가 많이 보인다. 사실 채식 위주의 식습관은 건강에 매우 좋다고 알려져 있고, 내가 아는 채식주의자들 가운데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나보고 채식주의자가 되라고 하면 못 되겠다. 워낙 고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고기가 없으면 생선이라도 먹어야 뭔가 먹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에. 뭐 이걸 더 깊이 파고들어가면 정치적인 논쟁이 될 수 있기에 더 언급하는 건 꺼려지지만, 어쨌든 채식을 초지일관 유지한다는 건 절대로 쉽지 않아 보인다.


 뜬금없이 채식 이야기를 소환한 건, 베토벤의 초기 작품들에게서 채식으로만 차려진 밥상의 느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빈 고전파”라고 불리는 3인방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공통점은 문자 그대로 고전적이라는 것이다. 정연한 질서를 가진 엣지있는 리듬, 객관적인 구조성, 단순하고 명료하고 간결한 성격 등을 이 세 사람은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큰 틀에서 봐서 그렇다는 얘기지 이 세 사람의 음악세계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좀 극단적으로 말해 각기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처럼 엄청난 차이점들이 있어, 각기 다른 체형의 세 사람이 옷만 같은 것을 입은 것과도 같다. 세 사람 중 상대적으로 가장 평탄한 삶을 살다 간 인물은 하이든이다(물론 와이프 잘못 만나서 고생한 건 있지만). 나머지 두 사람,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정말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당연히 음악에 그것들이 다 묻어날 수밖에 없다. 특히 베토벤의 경우 30대 초반 이후로 점점 멀어가는 귀와 평생을 씨름하면서 말 그대로 스스로를 하드캐리한 인생이다. 설령 베토벤의 음악을 한 곡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 스토리만으로 베토벤은 만인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할 정도다.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인에게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청각장애를 얻은 후 쓴 작품들이, 객관적으로도 그 이전의 작품들보다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고, 이것은 객관적인 데이터에 의한 것이 아니라(데이터로 분석해 봐도 결과는 똑같다) 누구든지 가슴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https://youtu.be/TWzMlIh5Xnk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2번 A장조 op.2-2

다니엘 바렌보임, 피아노



 그런데 이렇게 베토벤의 음악들을 접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간사함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그의 초기작들을 채식으로 차려진 식당에 비유한 것처럼, 초기작들을 나도 모르게 과소평가하게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토벤의 초기작들에서 중기 이후 나타나는 귓병이 불러온 웅혼한 페이소스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내가 내린 결론 또한 그냥 궤변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피아노를 치면서 그의 초기 소나타들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으니까. 그렇다고 들을 때도 저 유명한 8번 “비창”을 제외하면 크게 가슴을 울리는 것 같지도 않다. 문헌 수업 시간에 배우기를, 베토벤 초기 소나타는 “모방의 시기”로 정의한다. 선배 작곡가들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초기 소나타들의 롤모델은 상당한 부분이 하이든인 것 같다. 하이든의 영향권 아래 당대의 비르투오조로 이름을 날린 베토벤 자기 자신을 증명하듯, 어려운 테크닉이 대거 들어가 있다. 이러다 보니 치는 사람의 약점이 대놓고 뽀록이 나버리고, 어디에서도 숨어갈 틈이 보이지 않아서 치기가 영 부담스럽다. 물론 이것보다 더 세부적으로 어려운 것이 모차르트지만, 모차르트는 어려울지언정 짙은 감정적 페이소스를 지니고 있다 보니 나름의 재미라도 있어 기피하지는 않는 편이다.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다. 교향곡의 경우 나는 보통 1번을 제외한 그 뒤 여덟 곡만 자주 듣곤 한다. 피아노 협주곡도 마찬가지여서, 가장 먼저 쓰인 것으로 알려진 2번은 CD플레이어의 스킵 버튼을 누르는 것이 귀찮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듣지 않는다. 중기작 이후의 “귓병 뽕”이 너무 세뇌(?)된 탓일까? 분명 이 초기작들도 가까이할 가치가 있는 명작들임에 분명한데, 중기작부터 이어지는 그 페이소스를 느낄 수가 없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멀리하고 있다. 

https://youtu.be/ZcLkqm3-I4U?list=RDZcLkqm3-I4U

 베토벤 : 교향곡 1번 C장조 op.21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지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사실 별로 공감이 안가는 음악을 억지로 좋아할 수는 없다. 취향이란 놈은 언제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언젠가는 베토벤의 초기곡들도 좋아질 날이 오기는 하겠지. 베토벤의 초기작들에 별로 정이 안가는 현상은 역시 빌드업이라는 큰 틀에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한번씩 경기 시작 30초도 안되어 골이 터지는 경기도 있지만) 축구에서도 웬만해서는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골이 펑펑 터지지는 않는다. 즉 베토벤 음악 인생의 빌드업의 시작 단계가 초기작들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탄탄하게 쌓인 빅데이터들이 압축되고 버무려져서 중기 이후의 웅혼한 걸작들이 탄생한 건 팩트이니. 생각할수록 오묘하다. 청각장애와 맞바꾼 그 보석 같은 웅혼함에 길들여져서 초기작들이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이는 현상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나보고 그런 곡 쓰라고 하면 흉내도 못낸다는 것. 자기 차도 없는 사람이 렌터카로 제네시스 G80과 G90을 다 타보고 G80을 똥차라고 욕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실제로 둘다 좋은 차고 급만 한 단계 다를 뿐인데!). 아니다. 첨부터 얘기한 것처럼 채식만으로 차려진 식단을 건강 관리 차원에서 한 끼씩 먹는다고 생각하자. 피아노의 기초 테크닉이 엉망인 사람이 베토벤 초기 소나타를 한 곡 마스터하고 나서 실력이 많이 느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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