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하게 들으면 독서와도 같은 효과!
예고를 졸업하지도 않고 음대의 학부도 거치지 않은 채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서른이 넘어 피아노 전공 대학원으로 바로 진학하면서 전공자의 신분이 됐다. 이런 선택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비록 연주력은 “코스를 거친 이들에 비해” 부족하나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워낙 들은 양이 많기 때문이었다. 대학원에 와서 들은 건반음악 문헌 수업은 솔직히 말해 내게는 “누워서 떡 먹기” 수준으로 쉬웠고 점수도 잘 나왔다. 문헌 과목을 강의하신 교수님이 학생들 사이에서 학점이 짜다고 소문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점이 잘 나와서 기뻤던 기억이 난다. 그 수업 시간에 언급되는 곡들 중에 적어도 90퍼센트 이상은 내 귀에 익숙했기 때문에 시험을 앞두고 영어단어 외우듯이 작품목록을 달달 외울 필요도 없었다. 이렇다 보니 레슨 때도 선생님이 무슨 곡을 주셔도 일단 큰 그림은 다 파악한 상태에서 연습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연습에 들어가 보니, 이렇게 귀로 들어놓은 데이터가 많다는 것이 100퍼센트 이점으로 작용하지만은 않는다는 걸 느꼈다. 물론 큰 틀에서 봐서 유리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가장 큰 부작용은 무의식적으로 생각없이 특정 연주자를 따라하려는 시도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아예 완벽하게 따라할 수 있다면 문제될 게 없는데, 어설프게 따라하면서 엉터리 테크닉을 사용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더군다나 나는 들어본 곡의 가짓수만 많은 게 아니라 수많은 다양한 연주자의 연주들을 들어봤기 때문에, 연주 때 그야말로 종으로 횡으로 어설프게 섞여 버린 잡종 소리가 나오기 일쑤였다. 이런 것 때문에 참 많이도 혼났다. “제발 좀 너무 많이 듣지 마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의 습관이라 듣던 걸 아예 끊어버릴 수는 없어, 나름의 잔머리를 굴려 레슨을 집중적으로 받는 기간에 듣는 레퍼토리들은 피아노 곡을 피해 교향곡, 실내악, 오페라를 많이 듣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선생님들의 많이 듣지 말라는 코멘트를 절대로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많이 듣는 것은 분명히 도움이 된다. 다만 해가 되는 것은 그냥 음악을 틀어놓고 배경음악식으로 대충 느낌만 즐기는 것이다. 연주에 도움이 되게끔 음악을 듣는 방법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어느 정도 몇 가지의 원칙으로 정리가 됐다. 여기에 내가 직접 습득한 연주에 도움이 되는 감상 방법을 공유해 보고자 한다.
1. 프레이즈 단위에 주목하라
대가들의 연주와 그냥 일반 전공자, 취미생의 수준을 가르는 요소는 의외로 굉장히 간단하다. 아것은 뭉뚱그려 말해 프레이즈 한 개를 어떻게 갖고 노느냐 하는 문제다. 프레이즈 한 개에 기승전결이 잘 표현되어 있는가, 흐름이 자연스러운가, 시작음과 끝음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등의 눈에 당장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하늘과 땅의 수준차이를 만든다. 특히 한 프레이즈 또는 하나의 아티큘레이션의 끝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핵심 키워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옷을 잘 입는 사람과 “패션 테러리스트”의 차이는 소품 한두 개의 유무 여부에 따라 갈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특히나 요즘은 음원이 아닌 유투브로 대표되는 영상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이런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대가들이 어떤 몸짓을 쓰는지 유심히 보면 아주 좋다. 이것을 잘 살피기 위해서는 평소에 악보를 보면서 듣는 습관을 들이면 가장 좋다.
2. 해석이 아닌 터치와 소리에 주목하라
“해석”이란 영역은 대단히 직관적이고 추상적인 영역이다. 분명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한 영역인데, 무의식적으로 따라하기 정말 쉽다. 그런데 여기서 함정이 있는데, 생각 없이 해석을 따라가다 보면 기본이 되는 박자와 리듬을 날려버리기 일쑤다. 누구나 인정하는 대가들이 무턱대고 개성적인 해석을 투영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 안에는 철저하게 다듬어진 기본적인 박자와 리듬이 깔려 있다. 클래식 음악은 기본적으로 틀이 있는 음악이다. 축구에 비교해 보면 쉽다. 어떤 감독은 4-4-2을 쓰고 어떤 감독은 4-2-3-1을 쓰며, 어떤 감독은 3-4-3을 쓰지만 축구의 필드 플레이어가 열 명인 것은 같다. 클래식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개성적인 해석이라고 할지라도 작곡가가 요구하는 의도가 분명히 있고, 그것을 충분히 구현한 위에 개성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적으로 해석을 따라하려다가 음악을 망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해석은 그냥 “이 사람이 이렇게 치는구나” 정도로 끝내고, 대가들의 터치와 그 터치가 만들어내는 소리에 주목하자. 원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 어떻게 터치를 하는가, 어떻게 몸을 쓰는가, 어떻게 팔을 쓰는가 따위에 주목해서 보고 그것을 따라하다 보면 회당 수십만원을 지불해야 하는 유명한 교수님의 레슨보다 더 큰 효과를 보는 경우도 많다. 대한민국 여자축구 국가대표였던 골키퍼 김정미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의 동영상을 마르고 닳도록 보면서 동작을 연구하고 자신의 플레이에 적용해 한국 여자축구 최고의 골키퍼가 되었다고 한다. 피아노도 대가들의 터치와 동작,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평소에 잘 연구하다 보면 소기의 목표를 분명히 달성할 수 있다.
3. 타 장르의 음악을 많이 들어라
다른 악기 음악들을 많이 듣는 것이 자신의 악기 연주에 도움이 된다는 견해에 분명히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에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절친한 친구 사이로 많은 듀오 연주를 열곤 하는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의 일화인데, 클라라 주미 강이 손열음에게 “나는 모차르트가 영 자신이 없다”고 손열음에게 호소하니, 손열음이 내놓은 솔루션은 간단했다. “너희 아버지께서 성악가이시고, 너도 노래를 잘 하지 않느냐. 그것만 상상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클라라 주미 강의 연주에서는 이 코멘트 하나에 차원이 다른 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선율을 진하게 강조하는 습관이 있는 카라얀의 교향곡들 연주를 많이 들으면서 피아노 레슨 때 항상 강조하는 “윗소리 내기”에 대한 영감을 얻어갔고, 오페라와 예술가곡들을 많이 들으면서 타현악기인 피아노로 노래하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감을 잡기도 했으며, 실내악을 많이 들으면서 응집력 있는 소리와 함께 박자를 정확히 잡고 가는 개념을 잡기도 했다. 다른 악기 음악들을 많이 들어보는 것은 피아노 연주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몸이 반응하는 시너지가 분명히 있다.
피아노 연습시 많이 듣는 것은 결론적으로 득이 된다. 다만 똑똑하게 들어야 좋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나의 의견이고, 좀더 똑똑하게 들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똑똑하게만 들을 수 있다면 많이 듣는 것은 엄청난 자산이다. 모든 걸 경험할 수 없으면 독서가 간접경험의 방법이듯이, 많이 듣는 것 또한 독서를 통해 얻어지는 간접경험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