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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Feb 07. 2020

좀 제대로 압시다!

욕먹을 작정 하고 쓰는 체르니에 대한 팩폭들

 최근에 개인레슨 모집 유인물을 제작해 배포하면서, 광고 문구에 “바이엘, 체르니 NO”라는 문구도 삽입했다. 그러자 전화가 몇 통 왔는데, “체르니 없이 피아노를 배우는 게 가능하나요?”라는 질문이 상당수 들어왔다. 그들에게 그것에 대해 친절하게 조목조목 설명해 줬지만 목에 뭐가 걸린 듯 답답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레슨을 하고 다니는 내 눈으로 보기에 피아노를 꽤나 잘 치는 지인이 스스로 테크닉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내린 셀프 처방이 체르니 40번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만약 그 지인의 선생님이 그런 처방을 내렸다면, 그 선생님은 좀 미안한 표현이지만 돌팔이다). 사실 이런 경우는 엄청나게 숱하다. 성인 피아노 학원에 가보면 강사는 체르니를 가르치기 싫어하는데, 오히려 수강생이 자신이 부족하다며 체르니 30,40번을 스스로 들고 오는 눈물없이는 못보는 장엄한 코미디가 펼쳐진다(그래놓고 스스로 지쳐 나가 떨어지는 경우가 십중팔구다). 이런 광경을 보다 못한 내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하면, 오히려 역공을 받곤 한다. 전공했다고 잘난척 하느냐는둥, 당신이 뭔데 주제넘게 가르치려 드느냐는둥, 다들 그렇게 하는데 왜 그걸 부정하느냐는둥 이유는 여러 가지다. 이쯤 되면 가히 체르니 카르텔이다. 그것도 정말 지독한 텃세를 가진 하나의 세력 같은 느낌마저 든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나는 전공했다고 잘난 척 할 이유도,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릴 이유도 없다. 나보다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지천으로 널렸고, 내 앞가림 하기도 바쁜 판에 누구에게 오지랖을 부리겠는가? 다만 몇 가지 사실들만큼은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여기에 꼭 짚고 넘어갈 점을 딱 두 가지로 정리해 본다.


1. 진짜 문제는 체르니 그 자체가 아니라 100-30-40-50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공신력이다

 먼저 체르니 100,30,40,50이라고 칭하는 것부터 틀렸다. 정식 명칭은 각각 100 progressive studies op.139, Etude de Mecanisme op.849, The School of Velociy op.299, The Art of Finger Dexterity op.740이다. 이것을 일본에서 부르기 쉽게 그냥 이 곡집들 안의 곡수만 따서 체르니 100, 30, 40, 50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 곡집들의 원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원제목에는 각 곡집의 용도만 서술되어 있지 난이도, 단계 따위의 정보는 눈꼽만큼도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을 굳이 단계별로 구분하는 건 체르니의 의도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주어진 음악에 대한 모욕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엉터리로 짜여진 과정이 일본에서 피아노 교육용으로 널리 사용되면서 이 나라에 일체의 수정과 보완도 없이 그냥 들어왔고, 그것을 무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문제의식 하나 없이 그대로 정착해버렸다는 것이다. 100년이면 3대 내지 4대의 세대가 거쳐가는 기간인데, 체르니의 이 과정을 대체하는 교재들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현실적으로 최근 20년을 넘기지 않는다. 레스너들이 이 과정을 아예 세뇌 수준으로 신봉해왔다는 증거다. 카르텔도 이런 지독한 카르텔이 없고, 독재도 이런 독재가 없다. 신학대에 가면 학생들(예비 목사들)은 성경에 분명히 오류가 있다는 것을 배운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이 기성교회의 목사가 되면 성도들에게는 성경은 무오하다고 세뇌시키듯 가르친다. 이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 그 오류를 밝히는 것은 생각보다 상당히 쉬운 일인데, 그것을 세뇌시키니 부작용이 나올 수밖에. 일본산 체르니 과정을 이토록 신봉하는 것과 성경무오설을 게속해서 주입시키는 게 하등 다를 게 뭔가. 정리해 말하자면 일본에서 들어온 체르니 100-30-40-50의 학습과정은 공신력 자체가 없는 것이다. 더 어이없는 것은 이 과정이 아예 학원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변질된 부분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학습 속도가 빠른 사람이나 느린 사람이나 그냥 1번부터 끝번까지 진도식으로 쭉 나간다. 이런 구조에는 차라리 학습속도 느린 사람이 호구 잡기가 딱 좋다. 시간 끌면서 수강료는 착착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실상을 알면 정말 환멸감이 느껴질 정도이기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개인적인 불쾌함은 차치하고라도 이렇게 체르니의 의도에도 맞지 않게 변질되어버린 과정은 정말 적폐다. 성경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2.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모두 문헌적 지식이 없거나 만사 귀찮다

 “일본산 체르니 과정”을 논하면서, 가장 책임감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기존의 레스너들이다. 가르치는 사람도 피아노 기초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체르니 외의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굳이 애써서 공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본인이 해왔던 방식으로 하면 편한 것이다. 어릴 적에 이런 선생 밑에 배워온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려고 해도, 교재로 생각나는 것이 오직 체르니밖에 없다. 그러니 “역시 누구나 다 하는 체르니가 최고”라는 식의 어이없는 자기합리화로 돌아오고, 그 반대를 말하는 사람을 잘난 척 하지 말라며 몰아세우게 된다. 물론 최근의 젊은 레스너들은 상당히 달라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이 도그마에서 정말 한 걸음도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10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대를 이어서 말이다! 정말 엽기적인 현상이다. 예나 지금이나 음대에 가면 음악문헌 수업은 반드시 있을 텐데, 그들은 문헌 수업시간에 졸기만 한 건가. 굳이 교수법에 대해 깊이 연구해보지 않아도, 문헌사의 흐름만 보고도 “to do list”를 뽑아낼 수 있어야 정상이다. 초보자더러 쇼팽이나 리스트 에튀드를 척척 쳐내란 얘기가 결코 아니다. “체르니 100”수준 정도를 대체할 수 있는 깊은 음악성을 갖춘 아름다운 연습곡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얘기다(바흐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소품집, 부르크뮐러 25개의 연습곡, 슈만 어린이를 위한 앨범, 그리그 서정소품집 등등). 그런데 레스너들조차 이런 걸 모르거나 알고도 실천을 하지 않는다. 운전을 해서 대구에서 서울로 갈 때, 서울 내 목적지가 어디냐에 따라 정말 다양한 경로들이 존재하는데, 오직 가장 오래된 길인 경부고속도로로 쭉 가는 경로만 알려주는 꼴이다(알고 보면 이 경로가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경로 중 가장 비효율적인 경로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을 본인이 인정하지 않고 아는 척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일본산 체르니 과정을 대체하는(실질적으로는 그것이 정석인)교재의 설정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것이 체르니의 의도와 전혀 동떨어지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레스너가 바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공부해야 하고, 배우는 사람도 선생에게 끈임없이 바른 정보를 요구해야 한다. 타성에 젖은 교사와 배움의 열의가 넘치는 학생, 또는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래도 괜찮지만, 둘 다 타성에 젖어 있다면 그건 안하느니만 못하다.


 내가 이렇게 목에 핏대세워 주장한다고 어디서 돈 한 푼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내 레슨생이 늘어나는 데(체르니에 대한 만연한 “신격화에 가까운” 고정관념들 때문에) 솔직히 말해 방해가 되면 됐지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해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 사실 이러한 논의는 이미 음악계에서는 이제 논란도 안 될 정도로 많이 다뤄진 것이 엄연한 팩트다. 그런데 음악계에서 많이 다뤄지면 뭐하는가? 적어도 취미 수준으로 피아노를 배우거나 피아노 처음 시작하는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이 잘못된 일본산 체르니 과정은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체르니를 비판하면(다시 강조하지만, 체르니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100-30-40-50으로 이어지는 일본산 체르니 과정을 비판하는 것이다) 잘난 척 하지 말라는 소리나 듣는 이 상황은 흡사 군사독재로 장기집권한 전 대통령 누군가를 비판하면 좀비처럼 난리를 치는 세뇌된 일부 어르신들을 보는 것만 같다. 제발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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