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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Feb 01. 2020

못다 이룬 여인들의 꿀케미, 파니와 클라라

역사는 두 위대한 여인의 공조를 허락하지 않았다


 독일계 낭만주의 음악의 계보를 보면, 묻혀가기엔 너무나 안타까운 “아픈 손가락”같은 여인이 두 사람 있다. 멘델스존의 누나였던 파니 멘델스존(1805~1847)과 슈만의 부인 클라라 슈만(1819~1896)이 그들이다. 이들 두 여인은 분명 지금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겉으로 보면 각자 동생과 남편의 이름값 덕분에 이 여 여인들의 이름이 회자되고 있는 느낌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한다. 멘델스존과 슈만이 남겨 놓은 그 수많은 걸작들의 영감의 원천이자 중심이 이들 두 여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여인들은 그림자로만 남아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데는 두 사람 모두에게 “인간 말종” 같은 아버지들이 발목을 잡았다(조금 극단적인 워딩이지만 그녀들의 안타까움을 강조하기 위해 쓴 표현임을 일러 둔다). 

https://youtu.be/ti1eZ2B63Ro

파니 멘델스존 : 노투르노 g단조

헤더 슈미트, 피아노


 먼저 파니 멘델스존부터 살펴보자, 파니는 원래 동생을 능가하는 음악적 재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어렸을 때부터 사사했던 선생들의 커리어도 대단했다. 그녀를 가르쳤던 스승 요한 필립 키른베르거는 바흐의 직계제자였고, 클레멘티의 제자 루드비히 베르거가 피아노를,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 카를 프리드리히 젤터가 작곡을 이 여인에게 가르쳤다. 이러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파니는 불과 13세의 나이에 바흐 평균율 프렐류드 전곡을 공개연주회에서 외워서 연주했다는 당시로서는 “충공깽스러운” 기록이 있다. 그리고 멘델스존의 걸작 “한여름밤의 꿈”의 서곡은 멘델스존이 이미 10대 시절에 써놓은 작품인데, 이 때 배경을 보면 참 재미있다. 멘델스존은 파니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가지고 상황극을 하고 놀면서 이 곡을 썼다고 한다(어찌 금수저들은 노는 것도 클래스가 다르게 논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파니의 아이디어가 대거 이 서곡에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음악가로서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았던 그녀의 앞길은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막아 버린다. 여행 중이던 파니에게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이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너의 동생은 전문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여자니까 음악을 취미 삼고 현모양처가 되어라!”

 너무나 엄격했던 아버지의 명령에 파니는 저항 한 번 못하고 수긍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결혼도 잘 했다. 이런 누나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멘델스존은 내심 안타까웠다. 그래서 누나가 쓴 작품들을 자신의 작품집에 끼워서 출판하고, 사람들에게 일부는 누나의 작품임을 강조해서 설명하기도 했으나 사람들은 이미 대작곡가로 성장한 동생에게만 관심을 줬지 누나의 작품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행히 파니의 남편은 꽤나 진보적인 사람이라 아내의 음악활동에 대해 전혀 태클을 걸지 않고 오히려 지지를 해주었지만, 파니에게 아버지는 거역할 수 없는 존재였다(이 대목이 나는 참 안타깝다). 더군다나 동생 멘델스존은 그녀의 상황을 내심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버지가 두려워 표면적으로는 누나의 음악활동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작곡가로서의 행보를 눈치보지 않고 시작할 수 있었던 시기는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였다. 그녀는 동생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평생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바대로 살아왔어, 앞으론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이제 그런 삶이 불편해, 작곡가로의 나의 행보는 너와는 매우 별개의 독립적인 결정이며, 그리해 너에게 어떠한 불편함도 초래하지 않길 바래, 나의 작품들이 호평을 받는다면 난 앞으로 계속 작품 활동을 진전시킬 계획이야, 만일 반응이 시원치 않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삶에서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크게 실망하지 않을 거야, 나의 결정에 네가 너무 상심하질 않길 바래”


 이런 편지를 남기고 그녀는 적극적인 출판활동을 시작했지만, 1년도 안되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사인은 고혈압으로 인한 급성 뇌졸중. 아버지의 말도 안되는 압박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누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은 멘델스존은 불과 6개월 뒤에 유사한 증상으로 누나의 뒤를 따라가 버렸다. 얼마나 미안했겠는가. 멘델스존은 음악계에서 이미 사망한 아버지를 능가하는 힘이 있었건만 아버지의 그늘에 눌려 누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지도 못했기에. 

https://youtu.be/y0BLD9Lxzzk

클라라 슈만 : 피아노 트리오 g단조 op.17

보자르 트리오


 그런데 역사란 항상 대타를 마련해 둔다. 개개인으로 볼 때는 너무 잔인하지만, 역사의 큰 틀로 볼 때는 희생양이 생기면 반드시 그 보상이 주어지는 법이다. 그 역할을 감당한 여인은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였다. 클라라 역시 인간말종 아버지를 둔 비운의 여인이었다. 다만 딸을 다루는 방식은 달랐다. 멘델스존의 아버지가 딸의 재능을 알고도 억눌러 버렸다면, 클라라의 아버지는 딸의 재능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한 더 심한 “양아치”였다. 이런 상태에서 그녀의 눈앞에 등장한 슈만은 말 그대로 “구세주”였다. 비록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슈만이란 인물은 참 별난 사람이었겠지만, 클라라에게만은 달랐다.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였던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당연히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고, 아버지 비크는 온갖 교활한 공작들을 이용해서 그들을 갈라 놓으려고 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슈만은 법정 소송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맞섰고 결국 슈만이 이겼다. 이 과정에서 클라라는 연인이자 남편이 된 슈만의 지지를 등에 업고 파니와는 달리 초인적인 저항력과 생존력을 발휘한다. 슈만과 결혼할 때 아버지가 자신의 연주 수익을 한 푼도 주지 않자, 자신이 직접 독립적으로 연주회를 기획해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결혼자금을 마련하는가 하면 남성 중심이던 당시의 음악계의 거물들(요아힘, 한스 폰 뷜로, 리스트,브람스 등)과 스스로 적극적으로 접촉하면서 본인을 처절하게 알렸으며, 리스트를 라이벌로 간주하고 치열한 신경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 현재 우리가 피아노 리사이틀을 보러 가면, 세부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바로크 음악(바흐, 스카를라티 등)으로 시작해 베토벤 소나타를 거쳐 연주 효과가 좋은 낭만주의 캐릭터피스들로 마무리하는 구도가 가장 표준적인 구도인데, 이러한 프레임은 클라라가 시초다. 클라라는 피아노 리사이틀의 패러다임을 정립한 인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 슈만이 사망한 이후로는 남편의 작품들을 직접 편집하고 감수하며 남편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는 데 평생을 헌신했다. 한 마디로 불굴의 정신력으로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스스로 깨부수고 간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들을 보면 파니가 못다한 것을 클라라가 두 배로 해냈다는 느낌을 준다. 나이는 파니가 14살이나 연상이지만 활동시기는 상당 기간이 겹치므로, 사실상 동시대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당시 사회의 통념에 따랐는가 저항했는가의 차이만 있는 셈이다. 이 와중에 클라라는 당시로써도 장수했다고 할 정도로 상당히 오래(77세) 살았다. 이러한 긴 생애를 바탕으로 그녀는 바흐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건반음악 연주 양식의 전통을 수호하는 데 크게 공헌했고, 그 계보에 남편의 이름을 중요한 비중으로 올려 놓았다. 사실 지금 활동하는 수많은 여성 피아니스트들은 전원이 클라라의 빚을 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클라라의 고군분투에 가까운 공헌이 없었더라면 여성 피아니스트들이 지금처럼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지 못했을 테니까.


 이렇듯 적지 않은 족적들을 남겼지만, 각자의 아버지가 원인이 된 안타까운 에피소드까지 보유한 이 두 여인은 생전에 친분이 두터웠고 서로를 깊이 존경했다. 멘델스존과 슈만이 평생토록 절친이었던 것처럼, 이들도 그랬다. 어쩌면 본능적인 이끌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비교적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사망한 슈만과 멘델스존 사이와는 달리 이 여인들은 한 하늘 아래 공존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그들이 처음 만난 건 파니가 사망하기 불과 1년 전이다!). 파니는 일찍 세상을 떠난 반면 클라라는 오래 살았기에. 클라라는 3중주곡을 써서 파니에게 헌정하려고 했지만, 이 곡은 파니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헌정자 없이 출판된 곡이 되어버렸다. 이 두 여인이 오랫동안 교류했더라면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시너지 효과가 나지 않았을까? 이들의 재능이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는 환경이었더라면 음악 역사책이 분명 더 두꺼워졌을 것이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역사는 이들의 오랜 공조를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꿀케미가 보고 싶다면 직접 천국을 가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니 “아쉬운 대로” 살아 생전에 이들 두 사람이 쓴 곡들을 직접 연주해서 많이 알리고 싶다. 당장 악보서점으로 달려가서 이들의 악보를 사야겠다. 그리고 좀 쉬운 곡이라면 피아노 레스너로서 취미 레슨생들에게 권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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