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빈 출신의 피아니스트 프리드리히 굴다(1930~2000)는 특별한 존재다. 일단 내가 가장 먼저 그 이름을 인지한 피아니스트이자, 나중에 피아노 전공의 길에 들어섰을 때 손가락 분리가 안 돼서 고생했던 나에게 “랜선 스승”이 되어준 인물이기도 하다(음 하나하나의 분리감이 유독 뛰어난 그의 연주 동영상을 자세히 보고 따라하고 또 따라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가 연주하는 모차르트 협주곡이나 소나타들의 경우 그보다 잘된 연주는 아직도 한 명도 보지 못했으며, 베토벤 소나타나 바흐의 건반악기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그의 깔끔하고 이지적인 터치와 역동적인 리듬감 위에 때때로 공격적으로 삽입한 꾸밈음 등으로 보여주는 날카로운 도발의 맛은 언제나 각별하다. 이러한 그의 개성적인 연주는 그가 연주활동을 클래식으로 한정짓지 않고 재즈 등의 다른 분야들을 수시로 넘나들며 체득한 자유로움에 그 바탕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남긴 재즈 음반도 많이 있고 재즈 분야에서도 명반으로 인정받는 연주들이 적지 않으며, 연주 시 입고 나오는 의상도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나오거나 캐쥬얼한 의상을 입고 나올 때가 많았다. 이러한 캐릭터를 가진 굴다는 2000년에 70세라는 다소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스타일이 너무나 유니크해서일까? 굴다와 유사한 아우라를 지닌 피아니스트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그 20년의 기간 동안 좋은 피아니스트는 열거할 수 없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굴다가 주는 그 감성을 가진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진정한 예술가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굴다와 유사한 아우라를 풍기는 피아니스트가 결국은 나타났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그 주인공은 91년생의 부산 출신의 피아니스트 지용이다. 그는 줄리어드 음악학교를 전액 장학생으로 졸업한 뛰어난 피아니스트인데, 그의 행보는 일반적인 피아니스트와는 달랐다. EDM에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직접 팝의 가수도 되기도 하는가 하면, 팝 뮤직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구글의 안드로이드 광고를 통해 큰 이슈가 된 바 있다. 그는 세계적인 음반사 워너뮤직과 계약하며 첫 곡으로 과감하게도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고 나왔다. 이 거대한 작품을 과감하게 녹음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바흐가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그는 자기 작품을 연주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뭔가 특별한 것을 하기를 바랬을 거예요. 그는 변화에 열려 있기 때문에 21세기에도 의미 있는 변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환영했을 겁니다. 글렌 굴드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왜 두 번 녹음했는지, 그 이유는 명쾌해요. 같은 곡을 두 번 녹음했는데 그 두 버전이 매우 다른 이유는 음악가로서만이 아닌, 굴드가 인간으로서 겪은 모든 것이 연주에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녹음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했고, 모든 것에 제 생각을 분명하게 담았으니, 이제는 제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누군가의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쳐 결과적으로 여러분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든 더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 연주를 통해 진정으로 바랄 수 있는 건 그것뿐인 것 같아요.”
지용의 발언을 잘 보면, 그는 바흐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질서 속의 최대한의 자유”라는 개념을 정통으로 꿰뚫어 논하고 있다. 연주를 들어보면 두 번 놀란다. 굴다를 연상시키는 과감한 꾸밈음 삽입과 허를 찌르는 템포 설정, 듣는 이를 상대로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는 듯한 개성적인 스토리텔링이 선사하는 강력한 몰입감에 한 번 놀라고, 이러한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해석을 넉넉히 품고 보듬는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끝간 데 없는 깊이를 재발견함에 두 번 놀란다. 지용은 일찍이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무한한 범용성을 인정하고 들어간 것이다. 가히 굴다가 바로 소환되는 향수가 느껴진다.
물론 이 연주를 스텐더드한 연주라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다시는 나오기 힘들 것 같았던 독특한 개성을 지닌 진정한 예술가 굴다의 향기를 풍기는 피아니스트가 그것도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나왔다는 것에 반가움을 금할 길이 없다. 지용에 대한 워너 클래식의 부대표 장 필립 로랑의 발언에서도 내가 느낀 바와 똑같은 기쁨이 느껴진다!
“지용은 피아노 음악의 유산에 경의를 표현하면서, 전통적인 포맷을 비격식적으로 바꾸는 일에 아주 완벽하게 열려 있습니다. 음악성, 비르투오소적 테크닉으로 무장한 지용과 그가 지닌 불굴의 의지는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겁니다.”
더 반가운 것은, 지용의 행보에서는 굴다의 그것이 연상될 뿐이지, 굴다가 했던 그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느낌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큰 틀에서 활동 컨셉은 비슷하지만, 넘나드는 분야가 굴다보다도 더 폭이 넓으며, 방법론에 있어서도 훨씬 더 개방적으로 열려 있다. 또한 음악의 내용을 봐도 클래식 음악의 미덕인 “전통 수호”를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현재까지 고정되어온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자세만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음악적인 철학이 확고히 서지 않고서는 이러한 파격적인 활동 컨셉에 몸을 맡길 수가 없다. 이제 그의 나이 한국 나이로 서른. 그의 앞날에 꽃길이 열리기만을 진심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