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 크라이슬러리아나. 손끝으로 느껴야만 이해하는 그의 온전한 고통
작곡가 커리어의 초반부에 피아노곡을 대거 쓴 슈만의 작품목록들 가운데, 각각 작품번호 16번, 17번, 20번이 부여되어 있는 크라이슬러리아나, 판타지, 유모레스크는 거대한 산맥 가운데서도 유독 삐쭉 솟아 있는 봉우리 같은 큰 규모들을 가지고 있다. 이 세 작품의 의식의 흐름을 살펴보면, 뒤로 갈수록 상당히 차분해진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가장 앞쪽에 있는 크라이슬러리아나는 날 것 그대로의 격정이 활화산처럼 분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헌적 지식으로 논해보면, 크라이슬러리아나는 슈만이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이란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두 자아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를 병치해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투영된, 4일 만에 초스피드로 써서 쇼팽에게 헌정된 환상곡이다. 그런데 이러한 서술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박 겉핥기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슈만 : 크라이슬러리아나 op.16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피아노
약간은 정제되지 못한 서술이겠지만, 슈만은 이 곡을 쓸 때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기상천외한 화성과 리듬과 편집증적이라 해도 지나칠 것이 없는 강박적인 악상지시들이 난무하고 바흐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정밀한 대위법적인 기법들이 수시로 튀어나오며, 그러면서도 규칙을 잡을 수 있는 독창적인 틀(고정된 뭔가를 상징하는 “틀”이라는 개념도 슈만은 이 자체를 또 하나의 창조적인 장치로 만들어버렸다!) 이 존재하는 이 복잡하고 거대한 곡을 슈만은 단 4일 만에 써제꼈다. 가히 모차르트도 따라가지 못할 엄청난 스피드다. 수많은 대가들의 연주를 통해 이 곡을 들어보면 이 곡에 나타난 슈만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열 명의 연주를 들으면 열 명을 모두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복잡다단한 정서적 다양성에 이끌리게 되면 이 곡만으로 100가지의 연주를 듣는 것쯤은 진짜 일도 아니다. 개인적인 견해에 약간의 객관성까지 개입시켜 보아도, 낭만주의 캐릭터피스들 가운데 이 곡만큼 낭만주의를 짙게 농축해서 보여주는 작품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 느끼는 것은, 알고 보면 이 곡을 이해하기 위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직접 쳐보면 그 감흥이란 무어라 형언할 단어가 똑 부러지게 생각이 안 난다. 귀로 들어오는 기상천외한 불협화음과 대담한 리듬은 손끝으로 전달되며 절규로 변하고 만다. 고통이란 두 글자의 단어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날카롭게 갈린 한 자루의 활이 되어 내 심장 한가운데를 정조준하고, 그런 한음 한음이 모여서 프레이즈가 될 때는 묵직한 철퇴가 되어 나의 뒷통수를 호시탐탐 가격할 준비를 한다. 슈만이 이 거대한 곡을 4일 만에 써제낀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프레이즈 하나하나에서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고통이 가슴속으로 밀려 들어오는데,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나오는 슈만의 고통이야 오죽했으랴. 쓰는 시간이 앞서 언급한 그것을 넘겼더라면 슈만 본인도 목숨이 위태로워졌을지도 모르겠다. 고통이란 두 글자의 단어는 이 곡을 거쳐 나오면서 “예술”이라는 단어와 이음동의어가 되어있는 것이다. 기교적으로도 물론 어려운 곡이지만, 원템포를 내는 것이 아닌 악보읽기 단계에서 천천히 쳐도 슈만의 고통은 가슴속으로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온다. 이 글의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내가 2년이란 시간을 투자해 완성한 그 다음 작품번호 판타지는 이 곡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상당히 “calm down”된 곡이다. 그 곡 자체만 놓고 보자면 음악사상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격정적인 작품인데도 말이다. “슈만, 내면의 풍경”을 쓴 작가 미셸 슈나이더는 그 책에 아래와 같은 문구를 넣어 놓았는데, 이것은 특히 크라이슬러리아나에 가장 확실하게 적용되는 바일 것이다.
“슈만의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은 거의 신체적인 고통을 느낀다. 그의 음악은 우리를 쳐박고 유폐시키고 고립시킨다. 우리는 스스로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실제로 그렇다. 원 템포를 내지도 않고 악보읽기 수준으로 차분히 치는데도 묵직한 통증이 손목을 시작으로 윗팔, 어깨, 목근육까지 물에 한 방울 탄 물감처럼 번져 나간다. 듣기만 해도 슈만의 광기를 느낄 수는 있지만, 직접 쳐보는 그 느낌에 비할 바는 절대로 되지 못한다. 악보를 읽는 순간부터 고통이란 녀석이 물밀듯이 머리도 거치지 않고 가슴으로 쓰나미처럼 몰려 들어오니까. 대체 동서고금 이런 곡이 어디 있겠는가. 지옥에 스스로 가서 아예 그곳을 천국으로 만들어보려는 이상주의자의 하드캐리와도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슈만은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이상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직접 연주하기 위해서는 연주자도 슈만과 똑같이 미친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면 아예 정신과 의사에 빙의하던가. 문득 혼자서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해본다. 혹시 현역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 가운데 피아노를 수준급으로 치는 분이 있다면, 내게 연락을 해주시길 바란다. 정신과 의사가 연주하는 슈만 크라이슬러리아나는 어떤 느낌일까? 물론 비현실적인 상상이다. 현실은 이름 꽤나 날리는 피아니스트들조차도 버거워하는 난곡이 크라이슬러리아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