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와 빨리 친해질 수 있는 마법의 치트키
바흐 : 샤콘느 d단조
힐러리 한, 바이올린
음악의 조성과 관련해서, 비교적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려진 바는 c단조가 베토벤을 상징하는 조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베토벤만 이렇게 그 작곡가를 상징하는 조성이 있는 건 아니다. 작곡가마다 애용하는 조성과 음향적으로 잘 어울리는 조성이 다 따로 있다. 그런데 서양음악의 체계를 확립한 “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뒤집어 생각하면 특정 조성이 더 잘 어울리거나 하는 개념이 없을 것 같다. 모든 조를 골고루 쓴 이미지가 강하기 떄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확실한 바흐표 조성이 분명히 있고, 그 주인공은 d단조다.
바흐 :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 565
톤 쿠프만, 오르간
일단 d단조로 된 바흐의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샤콘느”로 유명한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2번,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 토카타와 푸가, 영국 모음곡 6번,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칸타타 82번 “나는 만족합니다”, 피아노 협주곡 d단조 정도가 떠오른다. 하나같이 “한방”을 갖춘 무게감이 무시무시한 곡들이다. 특히 나는 앞서 열거한 저 곡들의 무한한 자유로움과 활화산 같은 열정에 주목한다. 두 대를 위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들을수록 폭발적인 에너지가 느껴지고, “토카타와 푸가”의 어떻게 보면 폭력적인 느낌마저 주는 엄청난 에너지도 강력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느낌은 건반악기용 대곡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에도 똑같이 이어지며, “샤콘느”와 칸타타 82번,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서 나타나는 심연의 슬픔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강한 의지의 교차 또한 놀랍다. 그리고 이 곡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명제는 바로 무한한 자유다. 도대체 동서고금 어떤 음악이 겉으로 지극히 엄격한 외형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심하게 자유로운가. 좀 래디컬하게 표현해 파시즘과 아나키즘이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한 공간 안에서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본질적이고 또한 원천적인 자유를 음미하고 들어가면, 바흐의 d단조로 된 이 작품들이 주는 자유의 참맛은 자유를 극단적으로 추구했던 바그너파 독일 낭만주의 음악들이 근처에 따라가지도 못하겠다고 느낄 정도로 너무나 자유롭다.
바흐 :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 BWV 1043
슌스케 사토, 에밀리 딘 바이올린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
이러한 바흐와 d단조의 밀접한 상관관계에 대한 가설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 “푸가의 기법 BWV 1080”에 가면 빼도 박도 못하게 증명이 된다. “푸가의 기법”은 일단 바흐가 정확한 악기를 지시하지는 않았으나, 통상적으로 건반악기가 연주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인식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흐 연구가인 크리스토프 볼프는 이렇게 설명했다.
“푸가의 기법”의 목표는 푸가 작곡의 다양한 가능성을 건반 연주곡에서 펼쳐 보는 거대한 연습곡을 만드는 것이다. 바흐는 전통과 현대성을 결합하는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변증법적 원칙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알았다. 만년의 바흐는 그 어느 때보다 선구적인 곡을 썼다.”
바흐 : 푸가의 기법 BWV 1080
그리고리 소콜로프, 피아노
어쨌든 건반악기를 기준으로 기보된 악보를 보면, 바흐는 이 곡집 전체의 모든 곡들의 조성을 아예 d단조로 통일을 시켜놓았다. 이 재료를 가지고 무려 15곡의 푸가와 4곡의 카논을 만든 것이다. 그것도 단 한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말이다. d단조라는 하나의 조성과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이리저리 전개되는 음악의 스트럭쳐는 정말 자유로움과 경이로움 그 자체다. “푸가의 기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듣고 있다 보면, 바흐가 사망하는 그 날까지 음악적인 이상향을 최고의 상태로 구현하는 데 d단조의 조성은 0순위 파트너였다는 것을 피부로 생생하게 깨달을 수 있다.
이러한 근거들에 힘입어, 나는 바흐를 딱딱하고 어렵고 재미없게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 처방으로 바흐의 d단조 작품들만 쏙쏙 골라뽑아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확신컨데, d단조 바흐 작품들은 바흐의 매력을 다이렉트로 느낄 수 있는 “치트키”와도 같은 존재다. 특히 나이가 어린 음악 전공생들에게 추천한다. 어떤 악기든 바흐는 과제곡으로 필수인데, 바흐를 하기 싫어 “현타”가 오는 장면을 주위에서 숱하게 본다. 이 때 바흐의 d단조 작품들을 듣는 것이 바흐에 대한 부담감을 없애고 의욕에 부스터를 달아줄 곡들로 딱이다. 앞서 언급한 바흐의 d단조 작품들은 베토벤보다 열정적이고, 모차르트보다 더 선율적이며, 바그너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말러보다 더 스케일이 크다. 이것은 나의 명예를 걸고 장담할 수 있다. 찾아 듣는 수고를 덜기 위해 그 몇몇 곡들을 이 글에 링크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