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유랑 - 25년 4월
택배 기사님, 신원 미상의 누군가, 20XX호 입주민, 경비 아저씨, 누가 내 프라이팬을 가져갔을까.
어느 금요일, 오전 4시 25분 도착한 문자 하나.
‘택배입니다. 비밀번호 미기재로 부득이하게 1층 공동 현관 앞에 두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비몽사몽 문자를 확인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문자와 함께 도착한 사진에는 사람들이 한참 드나드는 문 앞에 덩그러니 놓여진 택배 상자 두 개가 보였다.
‘아, 안 되는데. 오늘 저녁에는 택배 넣으러 못 가는데. 집 앞도 아니고 1층 공동 현관이라니…’
절로 한숨부터 나오는 데에는 이유가 다 있었다. 엥? 그냥 빨리 1층 내려가서 택배 들고 올라오면 되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택배가 온 집과 지금 내가 잠에서 깬 집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염원해온 독립을 실현한 3월 말이었다. 앞선 계약이 임차인 사정으로 파기되어 급하게 나온 매물을 보러 갔다가 마음을 빼앗겨 가계약금을 걸게 되었고, 그로부터 4일 뒤 계약 체결, 그로부터 5일 뒤 이사를 들어오는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하게 되었다.
얼마 안 되는 짐에 이삿짐 트럭을 부르는 게 아까워 본가에서 조금씩 짐을 옮기기로 했다. 풀옵션으로 구했기에 새로 사야 하는 건 크게 없을 거라는 크나큰 착각과 함께, 얼른 독립을 실현하고 싶어 괜찮겠지 하며 저지른 일이었다. 막상 이사를 하고 입주 청소를 마치고 보니 텅~ 빈 집에는 치수를 재기 위해 갖다 둔 줄자와 며칠 버티기 위한 옷가지만 있을 뿐이었다.
사실 그냥 맨바닥에서 자며, 다이소나 마트에서 장 보며 당장 살아갈 수 있는 거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거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 로망을 가지고 살다보면 사람은 가끔 그릇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 휴지와 저 휴지가 다를 것이며, 꼭 이 휴지를 사야만 삶이 윤택해질 거라는 그런 생각. 입주 청소를 마친 바닥에 누워 독립을 염원하던 기간 동안 장바구니에 넣어뒀던 꿀템들을 신나게 시켜댔다. 당장 필요한 것, 그렇지 않은 것 구분 없이 마냥 신나게, 배송 일자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신나게…
결과는? 당장 필요한 게 없어서 새 집에서 편히 살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완전히 대책 없이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내겐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회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애인의 집이었다. 일주일 동안 그곳에서 신세 지며 집을 예쁘게 꾸며야겠다는, 말은 되지만 철은 없는 생각을 가지고 저지른 일이었다. 그러나 예상 못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집 앞에 무수히 많이 쌓여가게 될 택배 상자들이었다.
‘[쿠팡] 이*정님 주문하신 내역을 확인해주세요.’ ‘[29CM] 감사합니다. 주문이 정상적으로 완료 되었습니다.’ ‘오늘의집에서 주문하신 내역을 알려드립니다.’
모든 걸 인터넷으로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이었다. 오만 군데에서 택배를 시켰던 지라 매일이 택배 스케줄로 꽉 차 있었다. 화요일은 휴지와 밀대, 수요일은 러그와 테이블, 목요일은 소파와 스툴 뭐 그런 식. 매일같이 쏟아지는 택배를 마냥 집 앞에 방치할 수 없으니 퇴근하면 새 집으로 가서 택배를 뜯고 정리하고 다시 회사 근처의 애인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자는 일상이 이어졌다. 어차피 회사 근처이니 일찍 출근한 셈이라 자위하며 그 비효율의 스케줄을 진행시켰다.
그러던 금요일, 아침에 깨서 저런 문자를 보게 된 거다. 하필이면 약속이 있어 택배를 넣으러 가지 못하는 유일한 날! 베테랑 기사님들이면 으레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비밀번호를 적지 않은 스스로를 원망해봤지만, 그것도 잠시 뭐 별 수 있나. 회사도 가야 하고 약속도 깰 수 없고, 토요일 일찍 새 집에 가기로 했으니 그 때까지 택배가 안전히 있기를 바라며 금요일 일정을 소화했다. 길에 있는 자전거는 훔쳐도 다른 건 안 훔친다는 우리나라의 국민성을 믿으며.
그런데, 토요일 아침 새 집으로 가기 전에 함께 밥을 먹던 중, 애인이 의아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유랑아, 사실 내가 어제 유랑이 약속 가 있는 동안 걱정돼서 새 집에 혼자 갔다 왔거든. 근데 경비 아저씨가 말씀하시기로는 택배가 없어졌다네? 아침에는 있었는데 어느 순간 없었대. 그래서 주인이 찾아갔나 보다 했다시더라고.”
아니 이럴수가. 택배에 든 거 자전거 아닌데, 프라이팬인데. 그걸 왜 가져갔지, 어떻게 가져갔지. 날 대신해서 일을 처리하러 가 준 애인에 대한 고마움이 올라오면서도, 당연히 있을 거라 가정하고 그 프라이팬으로 주말에 요리 해 먹을 계획을 원대하게 세워둔 지라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뭐?… 경비 아저씨들은 교대 근무하니까 다른 분이 경비실에 넣어둔 건 아닐까?”
“아니야. 여쭤봤는데 경비실에도 없다 그러셨어.”
얼른 상황 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밥을 후다닥 먹고 새 집으로 향했다. 건물로 들어서니 1층에는 어제 애인이 본 분이 아닌 다른 경비 아저씨가 계셨다. 우리는 상황을 설명드리며 혹시 아시는 바가 있느냐고 여쭤봤다.
“택배가 1층 현관에 있다가 없어졌다고요? 어제? 아, 그 택배 기사 상습이에요 상습. 맨날 그러지 말라고 해도 1층 현관에 둬요. 일단 지금 보관하고 있는 건 오늘 아침에 온 이것밖에 없는데?”
혹시 다른 경비 아저씨가 챙기셨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애처롭게 물으며 경비 아저씨와 함께 경비실을 확인해봤지만 그곳에 확실히 내 택배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경비 아저씨가 20XX호 얘기를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다른 경비원이랑 교대하면서 20XX호가 뭔 택배 두 개를 다 들고 갔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이 얘긴가? 20XX호로 한 번 가봐요. 거기에도 없다 그러면 방재실 가서 CCTV 보여달라 하고요.”
그러고 보니 택배 기사님이 보낸 사진에 택배 상자가 두 개였다. 화질이 좋지 않아 몇 호인지는 안 보여 둘 다 내 것인가 싶었는데 뭔가 가능성이 있는 얘기 같았다. 단서를 발견한 형사마냥 신이 났다. 입주민이면 얘기가 쉬워지지, 찾을 수 있겠어!
경비 아저씨께 감사하다고 인사한 다음 애인과 나는 곧바로 20층으로 가 20XX호를 찾았다. 혹시 자기 게 아니라는 걸 발견하고 문 앞에 내놓지는 않았을까 했지만 그곳은 텅 비어있었다. 뭐야, 진짜 훔친 거야?!! 가져간 건 실수였으나 뜯어보니 마음에 들어서 입을 닫기로 한 건가. 아님 아직 안 뜯고 넣어두기만 했나. 알쏭달쏭 떠오르는 생각들을 뒤로 하고 벨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눌러도 20XX호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집에 없는 듯 싶었다.
이쯤 되니 오기가 올라왔다. 혹시 20XX호가 가져간 게 아닐수도 있으니 명확하게 파악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번엔 방재실로 향했다. 상황을 설명드리니 직원 분은 CCTV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셨다. 경찰을 대동해야 하는 거 아닐까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절차는 수월했다. 엄청나게 많은 각도로 촬영되고 있는 화면을 보니 안심이 됐다. 네 이 놈, 잡을 수 있겠군. 다시금 형사에 빙의해 화면을 살폈다.
“저기 저 화면부터 보면 될 것 같아요. 택배가 저기 놓여 있었대요.”
가장 먼저 확인한 건 1층 현관 화면. 택배 기사님이 내게 문자를 보낸 시각인 금요일 오전 4시부터 보기 시작했다.
“저거! 저거예요!”
오전 4시 20분쯤, 택배 기사님이 택배를 두고 가는 모습이 찍혔다. 괜히 원망스런 마음에 한 번 째려봐주고, 직원 분께 빨리 감기를 부탁드렸다. 한참 기다려야겠지 싶어 넋 놓고 화면을 보고 있는데,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오전 6시쯤 건물에 들어오던 한 남자가 택배를 살피더니 둘 다 들고 가는 게 아닌가! 잡았다 요놈. 네 놈이 20XX호이자 내 프라이팬을 가져간 놈이렸다?!
CCTV 화면을 바꿔가며 그의 동선을 따라갔다. 엘리베이터 앞 - 올라가기 버튼을 누른다. 엘리베이터 안 - 20층을 누른다. 20층 앞 엘리베이터 - 20XX호 방향을 향해 걷는다. 와, 이건 빼박이다 싶었다. 자연스레 내 프라이팬을 들고 들어가겠구만. 아무래도 입주민 번호를 받아서 연락을 해보든가 집 앞에서 계속 죽 치고 있어야겠다고 다짐하던 그 때. 20XX호 앞 - 남자가 문 앞에 택배를 두고 돌아간다.
예?! 뭐야. 누구신데 제 택배를 거기다 가져다 놓으시죠?! 택배가 1층 현관에 놓여 있던 게 불안했던 선량한 시민인가. 아님 일정이 있어서 나갔다가 나처럼 택배 기사님의 문자를 받고 가져다 두러 잠깐 들린 20XX호 입주민인가. 예상치 못한 광경에 CCTV를 열심히 따라가던 셋 모두 벙찌고 말았다.
“어… 저걸 왜 저기다 두고 가지? 일단 이 화면을 계속 볼까요?”
그 남자의 동선을 따라가는 건 프라이팬 찾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일단 화면에 있는 내 프라이팬의 행방을 쫓기로 했다. 다시 빨리 감기. 오전 10시 - 다른 택배 기사님이 내 프라이팬 위에 다른 택배들을 쌓는다. 오후 12시 - 배달 기사님이 20XX호 앞에 배달 음식을 두고 간다. 몇 분 후 - 손 하나가 나와서 배달 음식만 쏙 가져간다.
아니, 20XX호에 누가 들어가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집 안에 있었다니, 뭐가 뭔지 혼란스러웠다. 아까 그 남자는 선량한 시민이 맞았나. 아님 룸메이트인가. 어쨌든 집 안에 있던 사람은 쌓여있는 택배들은 모른 척 하고 일단 배달 음식만 쏙 가져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빨리 감기. 택배들은 한참 동안이나 20XX호 앞에서 안으로 들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후 4시 - 또 다른 택배 기사님이 다른 택배들을 갖다둔다. 이제 20XX호의 집 앞에는 엄청나게 많은 택배들이 쌓여 있어 내 프라이팬이 어디 있는지 잘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이상하네요. 혹시 아직도 20XX호 집 앞에 택배가 있는 건 아닐까요?”
계속 빨리 감기를 해도 20XX호가 택배를 들이지 않자, 직원 분이 물으셨다.
“아니요. 저희가 방재실 오기 전에 문 앞에 갔다 왔는데 택배는 하나도 없었어요. 밤 쯤에 들여 놓은 거 아닐까 싶은데… 계속 확인해보시죠.”
효율적으로 택배를 찾기 위해 시점을 몇 시간 뒤로 옮겨봤다. 새벽 12시 - 여전히 택배는 잔뜩 쌓여있었다. 다만, 같은 화면임에도 뭔가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어? 프라이팬만 없어진 것 같은데? 형태가 달라졌어요!”
애인이 외쳤다. 과연, 자세히 살펴보니 아까와 미묘하게 택배 위치가 달라져 있었다. 아래에서 두 번째 놓여 있던 내 프라이팬만 쏙 사라진 거다. 무슨 이런 황당한 일이!! 얼른 시점을 택배 상자들이 원래대로 놓여 있던 때로 돌렸다. 그리고 다시 빨리 감기.
밤 11시 30분 - 웬 남자가 20XX호로 걸어 온다. 아까 택배를 두고 간 남자는 젊었는데 이번에는 나이가 좀 있어 보인다. 어딘가 익숙한 낯이기도 하다. 남자가 20XX호 앞에 서서 택배 무더기를 바라본다. 허리를 숙여 택배 상자들을 뒤적이다 내 프라이팬만 빼서 가져간다. 아니… 다시금 벙쪄서 화면만 바라봤다. 이쯤 되니 너무 황당한 거지. 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수많은 상자 중 내 택배만 가져가는 게? 그 때, 애인이 또 한 번 외쳤다.
“어! 내가 금요일 밤에 택배가 없어졌다고 말씀드린 경비 아저씨인데?!”
설마 하는 마음으로 경비 아저씨를 의심하는 것도 잠시, CCTV에 찍힌 시간대를 확인하고는 순식간에 깨달음이 찾아왔다.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방재실 직원 분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내 집이 있는 7층으로 올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프라이팬은 그 곳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어찌나 허무하던지. 긴장감이 탁 풀리며 형사 모드가 해제되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금요일 밤 11시쯤, 내 집에 방문한 애인은 택배가 없어진 것을 깨닫고 경비 아저씨께 택배의 행방을 물었다. 당시 경비 아저씨는 아는 바가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계속 곱씹다 보니 1층에 택배 두 개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고, 혹시 20XX호가 둘 다 가져갔나 싶어 올라가 보신 거다. 근데 마침 20XX호가 집에 택배를 들이지 않고 있었던 거고, 아저씨는 택배 무더기 속에서 내 택배를 찾아내 친절하게도 집 앞에 가져다 두셨다는 이야기다.
반전의 반전의 반전의 반전 드라마. 택배 기사님, 신원 미상의 누군가, 20XX호 입주민, 경비 아저씨, 결과적으로 아무도 내 프라이팬을 가져가지 않았다.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가 좀 남긴 했지만 어찌 됐든 찾았으니 된 것 아닌가. 오며 가며 시간을 꽤 많이 써서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솔직히 너무 흥미진진했다. 조금은 귀찮고, 조금은 웃겼고, 그래서 오래 기억날 것 같은 하루. 친절한 경비 아저씨에게 다시금 감사를 느끼며, 오피스텔이라 관리비가 너무 비싸다고 투덜거렸던 걸 더는 아까워 말아야지 다짐했다.
아 참, 그래서 그 프라이팬으로 뭐 해 먹었냐고?
아직… 아무것도.
프라이팬아, 무사히 돌아와줘서 고마워. 요리는 다음 주말에 꼭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