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이야기

월간 유랑 - 25년 5월

by 유랑

1.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내가 팔뚝살 만지는 걸 참 싫어했다. 처음에는 그저 출산 후에 찐 살이 콤플렉스라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다. 온갖 보드라운 걸 좋아하던 나는 엄마가 거절해도 자꾸 자꾸 만지고 싶어했고, 여러 번 하지 말라며 밀어내던 엄마는 어느 날, 나를 잡아두고 말했다.


"엄마는 어렸을 때 선생님이 자꾸만 팔뚝살을 만지던 게 너무 끔찍한 기억이라 지금도 누가 만지는 게 싫어."


엄마가 고등학생이던 때, 팔뚝살의 촉감이 가슴의 촉감과 비슷하다고 주장하던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틈만 나면 반 여자 아이들의 팔뚝살을 주물대곤 했다. 너는 보드랍네 너는 딱딱하네 하며. 가슴을 만지는 것도 아니지 않냐며 뭐 어떠냐는 선생님의 태도가 엄마는 참 수치스럽고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 팔뚝살을 만지려고 하면 그 때가 생각나서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거다. 하물며 그게 자기가 낳은 딸의 작고 어린 손길이래도 그랬다.


그 선생님과 내가 같나- 괜히 민망해서 투정이 부리고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게 됐다. 내게도 비슷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때 수학 학원 원장님이 그 대상이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신랑이었던 선생님은 자꾸만 여자 아이들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백허그를 했다. 복도를 걸어다니는 아이들에게 친근함의 표현이라는 듯 뒤에서 업히는 식의 백허그였다.


워낙 장난기가 많은 선생님이다 보니 처음에는 그저 재밌는 장난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대상이 명확하게 여자 아이들만을 향한다는 것과 뒤에서 감싸 안은 손이 가슴에 닿아 머물 때가 많다는 게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지는 몸매에 대한 품평은 말할 것도 없었다. 원장이 하는 짓을 옆에서 보고 배운 다른 선생님도 비슷한 짓을 하기 시작했을 때쯤 나는 그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상황에서 벗어나는 법을 터득했다. 하지 마세요, 기분 나빠요, 그 말이 그렇게 어려웠다.


2.

좀 더 명백한(?) 성추행의 기억도 있다.


대학생 때였다. 술을 진탕 먹을 기세로 떠난 MT에서였다.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과 너무 재밌는 시간이었다. 거나하게 취한 나는 한숨 자기 위해 방에 들어와 누웠다. 소규모 MT였기 때문에 그 시간에 방에 누운 사람은 나 뿐이었다. 안심하고 잠에 들었다.


한창 자고 있던 와중,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어났다. 혹시 나를 깨우러 왔나? 여기서 깬 걸 들키면 다시 불려 나가서 술을 진탕 먹을 게 뻔해 계속 자는 척을 해야겠다 다짐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조심스레 들어와서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실눈을 뜨고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했다. 내가 친구로서 정말 좋아하던 선배였다. 선배는 여자친구가 있었고 나도 남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둘 사이 이성적인 교류는 없었다.


선배는 나에게 이상한 짓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 머릿속 카테고리에서는 그러했다. 별 생각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너무 일찍 취해 도망친 내가 민망하기도 해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선배가 내 곁에 쪼그려 앉는 게 느껴졌다. 내쉬는 한숨에 술 냄새가 진탕 풍겨왔다. 뭐지,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불안감에 내가 깊이 잠들지 않았다는 걸 알리고자 뒤척이며 돌아 누웠다.


소용 없었다. 선배는 내 상의 속으로 손을 넣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속옷 안으로까지 파고 들어왔다. 내가 허락하지 않은 내 몸을 제 멋대로 만져댔다. 내가 자고 있으리라 확신하며 깰까 두려운지 조심스럽게도 만졌다. 시발… 욕이 절로 나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취해서 감각이 잘못 된 건가? 이거 꿈인가? 뭐지? 그렇다기엔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일어나서 소리를 질러야 하나? 발뺌하면 어떡하지? 고민하는 사이 추행은 계속 이어졌고, 나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잠결인 척 뒤척이며 손을 털어냈다. 선배는 멈칫하더니 그대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방을 나갔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나는 가만히 누워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다시금 곱씹었다. 충격에 사로잡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배가? 그럴 법한 사람이 가한 행동이었다면 당장 일어나서 뭐 하는 거냐고 소리치고 따졌을텐데, 믿을 수 없어서 계속 의심하느라 그러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따져들지 못한 나는, 증거도 증인도 뭣도 없는 상태에서 그 선배가 그랬을 리 없다며 술 취해서 내가 잘못 기억하는 걸 거라며 오래토록 나를 의심했다. 그리고 아직도 선배에게 이 날의 일을 묻지 못했다.


3.

이런 기억들은 지독하게 남아 나를 따라다니곤 한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목이 안 움직였다. 잠을 잘못 자서 담에 걸렸구나, 보통 조금 지나면 풀리니까 버텨보자 하고 주말 출근을 했다. 별 생각 없이 일을 하다 보니 목의 상태가 갈수록 안 좋아져 갔다. 고개를 조금도 돌릴 수가 없었다. 급하게 주말에도 하는 한의원을 예약했다. 목에 침을 여러 방 놓고, 부황도 뜨고, 물리치료도 받으니 아주 조금 상태가 나아졌다. 한의사 선생님께서는 잠을 한 번 잘못 잔다고 생기는 담이 아니며,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된 결과라고 말씀해 주셨다.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회사 선배에게 내 목 상태가 이렇다더라 말씀드리니, 마사지를 추천해주셨다. 자기는 한의원이고 정형외과고 다 차치하고, 마사지를 받으면 나아진다는 거였다. 마사지는 동남아 여행에서만 받아 봤는데… 그 시원하고 짜릿한 감각, 참 좋았었지. 왠지 솔깃했다. 주말 출근을 한 또 다른 어느 날, 또 목 상태가 너무 안 좋아져서 급히 주변에 있는 마사지샵을 예약해 목 어깨 집중 케어를 받으러 갔다.


샵에서 제공해주는 옷으로 갈아입고 방 안에 가만히 누워 마사지사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생각지 못하게 남자 마사지사가 들어왔다. 당연히 여자 분일 줄 알았는데, 괜히 몸이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 밀폐된 공간에 단 둘이 있는 지금. 그 날, 그 때처럼 예상치 못한 곳으로 손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차올랐다.


긴장이 무색하게 마사지사는 프로였다. 조금의 불필요한 신체 접촉도 용납하지 않았다. 오히려 꼭 필요한 접촉에도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제스처를 취하셨다. 속옷 끈이 만져지는 부위는 수건을 대고 마사지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불쾌하지는 않은지 계속해서 내 상태를 확인하는 식으로.


조심스러운 손길에 몸을 맡기며 문득 슬퍼졌다. 이 분은 여자 손님들에게 내가 무해하다는 제스처를 끊임없이 취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셨구나 하고. 그리고 또 슬퍼졌다. 내 허락 하에 나를 만지는 사람을 앞에 두고 내 허락 없이 나를 만진 사람들이 떠올랐다. 긴장이 도를 지나쳤는지, 마사지를 받고 나서 나는 왠지 모르게 일주일을 구토와 열감에 시달렸다. 목의 통증 또한 눈에 띄게 나아지지 않았다.


4.

결국 내가 가진 이야기가 나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너의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이고, 나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인 것.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심하게 상처 입었느냐가 아니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원치 않는 사람에게 원치 않는 방식으로 만져지는 것은 생각보다 더 끔찍한 훼손을 남긴다. 손을 잡든 키스를 하든 가슴에 손을 넣든 다르지 않다.


나를 괴롭게 한 것은 결국 함부로 취급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를 동등하게 바라보지 않고, 대상화했다는 사실이다. 내 의사는 전혀 존중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당하는 성추행이 더 뼈 아픈 이유다. 내가 겪은 감정은 혐오감도 증오도 성적 수치심도 아니었다. 슬픔이었다. 내가 그를 존중하듯, 그가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 속상하다.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다른 좋은 면이 많다며 그 사람들을 속으로 계속 봐주는 내가 이상하다. 결국엔 내가 이상하다로 끝나는 이 사고의 흐름도 거지같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세상에 성추행이라는 건 뿌리 뽑혀야 한다고,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사라져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냥, 나는 이런 경험이 있고, 이런 걸 느꼈다는 기록. 그게 다다.


이런 기록이 무수히 많아지다 보면 세상이 조금은 바뀔까, 아니면 이야기는 계속해서 반복될까. 글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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