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나 Nov 18. 2020

책 만나러 가는 한 시간

중고책 가지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

 해외 떠돌이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한국 책이 참 귀하다. 독일에 살 때는 막데부르크에 한인 교회도 없어서 할레에 살며 베를린으로 한인교회를 나가던 유학생들이 그곳에서 빌려오는 한국 책 돌려가며 볼 때 나도 껴서 봤다. 런던에선 중고 시장에 나오는 한국 책을 사서 보거나 귀국 정리하는 집이 있으면 찾아가서 필요한 책을 얻어 오곤 했다. 깡시골이나 다름없던 막데부르크와는 달리 런던은 유학생과 주재원 이동이 잦아서 신간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2010년대부터 전자책이 대중화되어서 한국 온라인 서점에서 전자책 버전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이런 신세계라니. 모든 신간이 전자책 버전으로도 출간이 되지는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한계는 있지만, 읽고 싶다면 매일매일 하루 종일 한국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한국 책 접근성이 좋아졌다. 그래도 가끔은 버석거리는 종이에서 마른 잉크 냄새가 맡고 싶어 질 때가 있다. 특히나 바닷가가 보이는 한적한 카페 야외 테이블, 솔솔 부는 바람이 책장을 함께 넘겨주는 환경에선 종이책이야말로 분위기를 완성해 주는 필수품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일개미가 먹이 주워오듯, 지금도 중고로 종이책을 열심히 구해다 나른다.


 홍콩은 영국보다 한인 커뮤니티도 더 큰 것 같고 중고시장도 더 활성화되어 있다. 예전엔 해외 한인 커뮤니티 자체의 홈페이지에 회원가입도 하고 거기서 쪽지를 교환하며 책을 찾았다면, 지금 홍콩에선 1500명이 꽉 차 있는 오픈 카톡방이 있는데 그 중고 방에서 주로 책을 구한다. 홍콩은 집이 좁으니 귀한 한국 책이라도 오래 간직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 읽고 정리하고 읽고 정리하고를 반복한다. 나같이 주워 모아서 쌓아두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젯밤, 둘째 밤 수유를 위해 깨어 있었는데 마침 중고 방에 책이 올라왔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다시 주목을 받았던 정유정 작가의 28, 그리고 그의 작품 중에서 태백산맥밖엔 못 읽었지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조정래 작가의 허수아비 춤. 홍콩 섬 남쪽이라 우리 집에선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보고 싶은 책이라 바로 카톡을 보냈다. 보통 선착순인데 다행히도 내가 일등. 이럴 때 수유를 위해 깨어있던 보람을 느낀달까. 하하. 뭔가 목적이 달라진 것 같지만 말이다.


 그렇게 오늘 밥도 먹기 전에 지하철을 타고 책을 받으러 가고 있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창가에 서서 곧 만날 책을 상상하는 내 모습을 보니 문득 웃음이 난다. 홍콩이 워낙 작은 도시이다 보니 지하철로 한 시간이면 끝과 끝이다. 이 정도 거리에 사는 사람이랑은 친구도 안 하는데. 친구 만나러 삼십 분 지하철 타고 나가는 것도 멀다는 핑계로 다음에 보자, 다음에 보자 미루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서 책 두 권 받자고 한 시간 지하철을 타고 움직이는 내가 웃긴다. 종이책이 고프긴 고팠나 보다. 아기가 잠들고 아무 일이 없어야 밤에만 조금씩 읽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책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더 감사히 여기게 된다. 지하철에서 끄적거리는 지금, 책장을 넘길 밤이 어서 오길 기대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이 다가왔음을 실감할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