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나 Sep 29. 2020

기쁨 한잔

영국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 애프터눈 티

 영국에서 7년째 살며 매일 차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이전부터 홍차를 즐겨 마시던 내가 참새라면 이 나라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방앗간 같은 존재랄까. 차를 마시는 공간도 다양하므로 골라서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샹들리에가 휘황찬란한, 별 여러 개 달린 호텔에서는 남자 손님이 드레스코드에 맞춰 옷을 입지 않으면 넥타이와 재킷을 빌려준다. 보는 눈들이 있으니 격에 맞게 입으라는 압박이다. 여자 손님은 대부분 합격할 수준으로 꾸미고 오기 때문에 옷을 대여해 줄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이런 곳에서 애프터눈 티를 주문하면 화려한 3단 접시에 스콘과 샌드위치를 비롯해 알록달록 너무 예뻐서 입에 넣기 아까운 디저트류가 나온다. 어디 그뿐인가.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은식기와 아기자기한 꽃이 그려진 찻잔까지. 호사스러운 테이블에서 친구들과 여유롭게 수다를 떨다 보면 궁전에서 파티하는 귀부인이 부럽지 않다. 이렇게 허세 욕구를 채우는 한편 시골 골목길 모퉁이 허름한 찻집에선 여행자의 낭만을 만끽한다.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가면 어른 주먹보다도 훨씬 큰 스콘을 구워주는데, 삐걱거리는 낡은 테이블에 앉아 이가 빠진 잔에 차를 마셔도 실실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인심 좋은 찻집 주인이 고마워서일 테다. 외국인인 나도 이렇게 푹 빠진 영국의 차 문화는 참 매력적이다.


 17세기에 찰스 2세의 왕비 캐서린 브라간사(Catherine of Braganza)가 영국에서 홍차를 유행시켰고, 18세기에 7대 베드포드 공작부인인 안나 러셀(Anna Russell)이 오후에 간식을 곁들여 차를 마시면서 애프터눈 티가 시작됐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영국에선 하루에 평균적으로 3~5회 차를 마시고, 애프터눈 티는 영국의 효자 관광상품이 되었다. 영국으로 관광 온 외국인들은 하이 티(High Tea)를 자주 주문하는데, 그것은 “high”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기에 더 격조 높은(?) 티 타임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하이 티는 노동자 계급의 저녁 식사를 뜻한다. 옛날에 하인이나 노동자들이 높은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차를 마실만 한 시간은 일이 끝난 후뿐이었기 때문에 고기나 파이 등 저녁 식사를 하면서 차를 더한 것이 하이 티였다.   

 

 영국 상류 사회에서 차를 마시는 것이 유행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점점 그에 관련된 에티켓이 생겼고, 심지어 선보러 가서 상대방이 차를 어떻게 젓는지, 그리고 어떻게 마시는지를 보고 괜찮은 신붓감, 신랑감인지를 판단했다고 한다. 티스푼은 찻잔의 시계 6시 방향으로 넣어서 12시 방향 앞뒤로 움직여야 한다. 찻잔 안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는 것은 선자리에서 바로 거절당하고 싶을 때나 하는 동작이라나. 차를 따를 때의 순서는 차-우유-설탕 순이다. 옛날에 하인이 시중을 들었을 때는 고급 도자기인 찻잔을 보호하기 위해 우유를 먼저 붓고 차를 따랐다고 하는데 이젠 개인의 취향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어서인지 차를 먼저 따르고 입맛에 맞게 우유를 더한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마시고 11시쯤에도 마시지만, 오후 3시에 5시 사이가 전통적인 애프터눈 티 타임이다. 차뿐 아니라 곁들이는 스콘도 먹는 방법이 따로 있는데 그건 바로 스콘을 절대 샌드위치를 만들 때처럼 칼로 가르지 않고 손으로 쪼개 먹는다는 것이다.

  

 스콘 하면 몇 년에 한 번씩 인터넷이나 잡지에 등장하는 데본과 콘월의 크림 티 원조 공방을 빼놓을 수 없다. 영국에서 차 문화가 시작된 것이 17세기부터인데 지금까지도 해결이 되지 않은 아주 오랜 원조 싸움인 것이다. 이 공방의 중심은 스콘을 먹는 방법이다. 스콘에 크림을 먼저 바르고 딸기잼을 얹으면 데본식, 스콘에 딸기잼을 먼저 바르고 그 위에 크림을 얹는 것이 콘월식이다. 아니, 차 마시면서 곁들이로 먹는 빵에, 크림이 먼저든 잼이 먼저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한입 물어 삼키면 잼이나 크림이나 매 한시에 위장에 도착할 것이거늘…. 내게는 겨우 그 정도의 존재감으로 다가오는 이 문제가 영국 데본과 콘월 지방 사람들에겐 자존심이 달린 중요한 일인가 보다. 잊을 만하면 꼭 한 번씩 미디어에 등장한다. 올해 다시 떠오른 이 원조 공방을 보며 버킹엄궁에서 왕가의 요리사로 일했던 Darren McGrady가 SNS에 글을 올렸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항상 잼 먼저 바르고 그 위에 크림을 얹는단다. 오 이런. 나랑 반대구나. 나는 뼛속까지 평민인가. 스콘 하나도 왕실 사람들처럼 먹지를 못하는구나. 하여튼, 왕실의 존재와 여왕을 사랑하는 나의 영국인 친구들은 이 SNS 글을 읽은 후, 스콘에 크림부터 바르고 잼을 얹어서 먹기 시작했다. 뭐, 나는 여전히 먹던 대로 먹는다.

   

 오늘도 찻집을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틀어 올린 구불구불한 머리, 나풀거리는 긴치마를 덮는 새하얀 앞치마. 발그레한 얼굴에 미소를 띤 중년 여인이 달그락거리며 진한 홍차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콘을 내어놓자 햇살이 주전자 속 춤추는 찻잎을 비춘다. 아름다운 춤사위 후 사르르 가라앉는 찻잎처럼 내 마음도 평온해진다. 주먹만 한 작은 잔에 담긴 이 갈색의 액체가 어찌 이리 큰 기쁨을 주는지.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전통에 따라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는 것들은 그새 깡그리 잊어버렸다. 아무려면 어떠한가. 어서 맛을 보고 싶을 따름이다. 어느새 홍차도 나와 만날 준비가 다 됐나 보다. 자, 이제 우리 기쁨 한잔할까요?

작가의 이전글 도리도리와 끄덕끄덕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