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22, 2025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

by 헤매이는 자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벽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일에도, 인간 관계에도, 별로 과몰입해본 적이 없다.

항상 '그런가보다...' 라는 사고방식으로, 적당한 거리를 뒀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일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나 자신과 다른 '새로운 자아' 를 만들면 된다.

집에서 혼자 놀고 있는 나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회사는 그냥 나의 생계를 유지하면 되는 곳이었고,

어차피 헤어질 사람들에게 감정을 낭비하지 않았다.


써놓고 보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뭐 아무튼 편하긴 했다.

인간관계에서 무슨 일이 있든,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든, '나' 라는 사람에겐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장점' 이라고 이야기해줄 땐,

언제나 냉담하리만치 차갑고, 차분하고, 부담없고, 판단 및 정죄하지 않고, 편하다는 칭찬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고 나서, '나도 이럴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과몰입하고 있다.

'과몰입' 이란 단어의 어감이 좋지는 않고, 연애 초기에는 나의 과몰입이 그녀를 괴롭히기도 했다.

분리불안장애인가 자가진단도 해봤다.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다.


지금 적절한 선을 찾고, 중용의 미덕을 가지고 서로 더 든든한 사랑을 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는,

다른 그 무엇보다 그녀에게만 특별히 몰입할 수 있는 내 자신이 오히려 자랑스럽다.


요즘은 그녀의 이름에 집착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 제일 행복하다.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봤을 김춘수 씨의 시 "꽃" 에서,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참 다른 의미이겠지만, 내게 제일 다가오는 곳은 이 구절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녀라는 꽃이 나에게 날아온다.

그녀의 이름 세 글자를 가진 다른 사람을 평생 본 적이 없다. 흔하지 않은 이름이라, 더욱 좋다.

닿을 듯 닿을 듯, 손에 잡히지 않던 그녀의 모습이, 내가 그 이름을 부를 때 내 안에 거한다.


SNS 나 쇼츠에서 그 어떤 자기계발 메세지가 뭐라 한들,

세상 일은 간절히 바라고 열심히 일한다고 모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전부 얻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하지만 사랑과 희생과 노력으로, 손에 잡히지 않던 무언가가 실체화되고 구체화되는 일을,

뉴스에서든, 영화에서든, 만화에서든, 주변에서든, 음악에서든 마주쳤을 때, 나는 눈물이 난다.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나의 눈물 버튼이다.


그녀와 나는 서로 다른 관심사가 있어서,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참 좋다.

하지만 서로의 결이 비슷하고 서로에게 관심이 많아서, 함께 무엇이든 즐겁게 교류할 수 있다.

그녀는 예쁘고 화려한 장관의 '호두까기 인형' 을 좋아한다.

현재 인간이 아닌 존재가 발레로 구체화되는,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광경을 총총한 눈빛으로 본다.


그녀는 '미녀와 야수' 의 노래 중에서 'Human Again' 을 제일 좋아한다.

공동체 모두가 희망에 찬 새 세상을 꿈꾸는 노래라서 좋아한단다.

희망에 차서 묵은 먼지도 털어내고, 새단장하는 모습을 좋아한단다. 그녀와 참 어울리는 노래이다.


그녀야말로 동화 같이 생긴 사람이다. 그녀를 보면 '미녀와 야수' 의 Belle 이 많이 떠오른다.

갈색 머리카락, 눈썹과 눈 모양, 입술 모양, 살짝 웨이브진 세미롱 머리, 동네 최고 책벌레라는 기믹,

고상하고 지적이고 우아한 인상과 온화한 눈빛이 Belle 을 빼닮았다.

Belle 이란 이름이 프랑스어로 'Beauty' 임을 감안하면, 아름다운 그녀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진실과 진심의 힘으로 찻주전자, 촛대, 시계, 야수가 사람이 되는 이야기는 아름다운 교훈을 준다.

유명한 영화 시리즈 토이 스토리도 비슷한 결이고, 그래서 참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 가지 작품으로는 동화 하나, 게임 하나가 있다.


영국 고전 동화 The Velveteen Rabbit 을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아이가 사랑하고 사랑해준 토끼 인형이 진짜 토끼가 되는 동화이다.


"진짜라는 건 어떻게 생겼느냐를 말하는 게 아니야. 너에게 일어나는 일이지.

아이가 너를 아주아주 오래도록 사랑할 때, 그냥 갖고 노는 게 아니라 정말로 사랑하게 되면,

그 때 너는 진짜가 되는 거란다 ...

진짜가 될 때쯤에는 넌 아마 누군가 아주 많이 쓰다듬어 줘서, 털도 다 닳고 눈도 떨어지고,

팔다리도 너덜너덜해질 거야. 아주 볼품없게 되겠지.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단다.

진짜가 되면 너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는 흉하게 보이지 않으니까."


진짜도 가짜가 되고, 가짜만이 판치는 세상에서,

나는 나에게만은 진짜인 존재를 찾고 싶었다.


나는 많은 게임들을 좋아하지만, 언제든 세 손가락 안에 들 수 있는 게임은, 파이널판타지 10 이다.

남주인공 '티다' 와 여주인공 '유우나' 의 사랑 이야기가 주된 플롯이 되는데,

게임 후반부에 밝혀지는 진실은, 주인공 티다는 사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꿈' 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구하는 대가로 티다는 꿈으로 사라져가고, 유우나는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 게임을 하고 울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속편 파이널판타지 10-2 에서는 다행히 티다가 '실체화' 되어 유우나의 곁으로 돌아오게 된다.

유우나의 그리움에 덧붙여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진짜 사람이 된 것 같다.

언제 헤어졌냐는듯 둘이서 꽁냥꽁냥하고 있는 해피엔딩을 보면, 다른 의미의 눈물이 난다.


나는 내가 누구보다 믿고,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오래 바라고 그려왔다.

어느날 그녀가 내 눈 앞에서 실체화되어, 손잡을 수 있고, 입맞출 수 있는 현실이 되었다.

현실의 그녀는 압도적으로 꿈결 같다.


나는 내가 그녀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그녀와 같은 사람이 나를 사랑해준다는 게,

아직도 가끔은 믿을 수 없다.

그녀는 나의 토끼 인형이고, 나의 티다이며, 나의 Belle 이고, 나의 꽃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그녀의 이름은,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오늘의 그녀는 희망에 차서 새단장하는 모습을 안아주고 싶었고,

믿고,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을 본받고 싶었고,

그 어떤 디즈니 공주보다 예쁜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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