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1, 2025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

by 헤매이는 자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오랜만에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길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겨울잠을 자던 곰에게 봄이 왔다고 알려주듯, 그녀의 목소리는 내 몸과 마음을 깨워준다.


그녀는 아침식사로 팽이버섯, 두부, 셰이크, 과일 등을 건강하고 단정하게 차려먹고,

아침에도 운동을 하고, 밤에도 운동을 하면서도,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다며 반성한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언제나 예쁜 그녀라고 내가 외모에 대해 칭찬이라도 할 분위기이면,

정작 대화 주제를 홱 돌려버리곤 한다.


'외모' 에 대해서는 본인의 가혹한 자가진단 외에는, 나의 어떤 언급도 마다하는 그녀.

하지만 그래서 그녀가 더 예쁘다.

오늘도 예쁘다. 사랑한다고, 예쁘다고, 죽을 때까지 말해주고 싶다.


그녀의 커리어에 있어 큰 변화를 주고, 공부까지 열심히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내가 큰 도움이 못 되는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해줬다.

"나에게 오는 길을 혼자 걸어오느라 고생이 많아, 기다리고 있을게. 보고 싶고, 사랑해."


그녀는 그녀답게, 씩씩하게, 오늘도 감동적인 답을 해준다.

"터널을 나와 빛으로 향하는 길이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이야."

이런 답을 들을 수 있는 나는 세상에서 제일 운이 좋은 사람이고, 드라마 속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야말로 나의 빛이다.


그녀의 추천으로 영화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를 봤다.

그녀가 학생이었을 때 봤고, 여행 영화로서 눈이 시원해져서 좋았던 기억이 있단다.

이 영화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우연한 언급에, 오늘 야근하지 않는 날이라 볼 수 있었다.


나는 벤 스틸러 (Ben Stiller) 를 배우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좋아했다.

당연히 '쥬랜더' 시리즈라든가,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에서도 즐거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최근 2년간 내가 본 드라마 중 가장 재미있었던 Severance (세브란스: 단절) 의 연출도 맡았다.


애덤 스콧 (Adam Scott) 이 악역으로 출연하는지 몰랐는데, 갑자기 나와서 정말 반가웠다.

좋아하는 배우다. 애덤 스콧이 주인공인 "세브란스: 단절" 을 처음부터 끝까지 3번은 봤고,

또 그가 주인공 중 한 명을 맡았던 시트콤 "Parks and Recreation" 을 20번은 봤던 나로서는,

애덤 스콧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의 초장부터 나오니 정말 좋았고,

'세브란스: 단절' 에 나올 법한 회사의 분위기를 이 영화 초반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코미디언 코난 오브라이언 (Conan O'Brien) 이 카메오 출연을 했다.

월터가 코난의 토크쇼에 출연하는 상상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어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실제로도 벤 스틸러는 코난의 쇼에 여러번 출연했다. 그때마다 재밌는 출연자였다.


감독, 제작, 주연을 모두 맡은 벤 스틸러의 재능과 취향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그녀의 추천이 내 눈에 콩깍지를 씌울 수밖에 없긴 하지만, 아무리 짜게 줘도 10점 만점에 9점.


주인공 월터는 맨하탄 록펠러 센터 빌딩에 있던 사진 잡지사, LIFE 의 사진 현상 에디터이다.

영화는 월터가 방금 42세 생일을 맞은 시점부터 시작된다.

영화 초반의 월터는 안경을 끼고, 보수적인 샌님 같은 모습의 전형적인 샐러리맨이다.

2013년작 영화이고,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나는 감독이 오늘날 나의 삶을 보고 만든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가 흘러감에 따라, 그는 안경을 벗고, 점점 의상도 캐주얼하게 변해간다.

맨하탄의 빽빽한 빌딩숲과 대비되는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히말라야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다만 영화에서 표현된 그린란드와 히말라야는 사실 모두 아이슬란드에서 찍었다고 한다)

월터가 원래는 상상도 못할 일들을 현실로 겪으며 어떻게 성숙해지는지 보여주는 영화이다.


나는 평생 못 가볼, 장엄한 대자연의 시원한 영상미가 압도적이었다.

어렸을 땐 모히칸 머리를 한 채 스케이트 대회를 휩쓸었지만,

아버지를 여의고 멀리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아름다운 풍광을 가르며 긴 내리막을 활강하며,

꿈꾸며 약동하던 어린 시절의 힘과 동심을 일깨우고 되찾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났다.


이 장면을 포함해서, 여러 장면에서 그녀가 떠올랐다.

사진작가 숀 오코넬 (숀 펜 분) 이 눈에 잘 띄지 않아 '유령표범' 이라 불리는 눈표범을 묘사하며,

"Beautiful things don't ask for attention." 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은 주목을 받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실재하지만 만나기 어렵다. 고고하게 숨어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우연히 만났고, 아름다운 그녀는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누구의 관심이 없이도,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언제 나타날지 모를 눈표범이 카메라의 핀트에 들어온 장면에서,

숀 오코넬은 그 아름다움에 취해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 때 사진을 찍지 않으면, 다시 며칠을 기다려야할지 알 수 없는데도,

셔터를 누르지 않고, 그냥 두 눈으로 눈표범의 자태에 빠져있다가 잃어버리고 만다.


그녀라는 아름다움을 볼 때의 나의 모습 같았다.

그녀는 너무 아름다워서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그녀를 쳐다보곤 한다.

나의 남루한 눈에, 그녀의 생기 넘치는 눈을 담을 수 있도록.


그녀는 우리의 여행 영상을 편집하면서,

우리의 여행 후반부 쯤 잘 먹고, 푹 쉰 여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 못 생겨보인다 했다.

나는 그녀와 논쟁하고 싶지 않지만, 이 말에는 반기를 조금 들 수밖에 없었다.


나와의 꿀맛 같은 휴식이 계속될수록 몸과 마음이 편하고, 행복해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내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도 셔터를 누르지 않고, 그냥 두 눈으로 그녀의 자태에 빠져있다가 나를 잃어버리곤 했다.


나는 그녀보다 그녀를 잘 안다.

그 누가 뭐래도, 그녀 본인이 부정해도,

내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진정한 그녀의 모습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안아주고 싶고, 가장 본받고 싶은 모습의 사람이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과장이 아닌 사람이다. 아름답디 아름다운 사람이다.


LIFE 잡지 폐간호의 커버로 쓰인 월터 본인의 사진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월터가 계속 찬 시계는,

해밀턴 (Hamilton) 사의 Pan Europ Chronograph 시계가 틀림없어 보인다.

그녀와 함께 차봤던 해밀턴 시계가 생각났다.


월터가 여자 주인공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엔딩에선,

그녀의 작고 예쁜 손이 그리웠다. 손 잡으면, 나와의 커플링의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그 손 말이다.


그녀가 왜 이 영화를 재밌게 봤는지 알 수 있고, 내 마음이 벅차오르는 장면들이 많이 있었지만,

제일 마음에 드는 장면은, 월터가 자신을 해고한 불편하고 어려운 상사 (애덤 스콧 분) 에게,

욕을 하거나 분노하는 저열함이 아닌, 차분하고 소신 있는 발언으로 고상하게 훈계하는 장면이다.

월터의 그 어떤 말도 안 되는 상상보다, 가장 영화적으로 판타지적인 장면이라 생각한다.

월터는 모험을 통해 좀 더 현명한 사람이 되었고, 용기 있는 고결함을 보여준다.


왠지 모르게 저 장면에서 그녀가 제일 많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현명하고, 제일 고상하고, 또 제일 용기 있게 고결한 사람이다.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지나치게 생각하기 전에 생각을 멈추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를 계속 닮아가려고 한다.


그녀와의 시간은 매일이 모험 같았다. 굳이 롯데월드에 갈 필요가 없었다.

나는 몽상가일 뿐이었지만, 그녀와 모험을 떠나려 한다. 더 용기 있을 수 있도록.

그리고 언젠가 잡지에 실릴만한 사진을 찍고 싶다. 이미 세상에서 제일 예쁜 모델을 구했으니까.


LIFE 는 실제로 존재하는 회사로,

영화에서처럼 잡지는 폐간되고 웹사이트로 운영되고 있다 (https://www.life.com/).

LIFE 사진전을 2013년, 2021년 세종문화회관에서, 2017년엔 한가람미술관에서 했던 것 같다.

언젠가 LIFE 사진전을 그녀와 꼭 손잡고 가보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영화든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그녀가 많이 떠올랐다.

나의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그녀라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고귀한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내가 20여년 동안 그녀를 보지 못한 삶이, 그녀를 사귄 최근에 압도되는 그저그런 시간이 아니라,

지금의 찬란한 시간이, 그녀와 내가 각자 쌓아온 20여년 또한 찬란했음을 알게 해준 것이었다.

그 성실하게 살아온 길 덕분에, 우리는 결국 같은 기차 정류장에서 만났으니까.


LIFE 잡지의 발행인이 창간호 발간사에 실제로 쓴 글을 영화적으로 다듬은 대사 또한 감동적이었다.

"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see behind walls, draw closer, 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 That is the purpose of LIFE."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 (LIFE) 의 목적이다."


그녀를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녀와 서로 알아가고, 그녀를 느끼고 싶다. 그것이 바로 나의 인생의 목적이다.


우야든동, 그녀가 지나치듯 언급한 것을 잊지 않아서, 이렇게 좋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더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녀는 나의 모든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줬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의 그녀는 어두컴컴한 터널을 혼자 걸어오는 모습을 안아주고 싶었고,

빛을 향해 당차게 걸어가는 모습을 본받고 싶었고,

'아름답다' 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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