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0, 2025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

by 헤매이는 자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오늘도 그녀는 루틴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영어 이름을 'Routine' 으로 해야할 판이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한 정신에도 출근 준비를 깔끔하게 한다.

마음이 심심하고, 입이 심심해서, 과자가 땡길 때에도, 결국 과자를 먹지 않고 건강한 것만 먹는다.

점심으로는 건강한 구성의 샌드위치를 반쪽 먹고,

'저녁에 운동 후 폭식 예정' 이라고 하소연하더니 정작 폭식은 하지 않는다.


아침에 운동을 갈 수 있었는데 조금 게을러서 하루 못 갔다고, 느슨해졌다고 자책한다.

그녀의 근육을 뜨겁게 할 뿐 아니라, 웃는 얼굴로도 그녀 속에서 열불이 조금 오르게 해주시는,

재주 좋으신 퍼스널 트레이너 선생님께 트레이닝을 받는다.

PT 후 분명히 곱절로 만신창이일 몸으로도, 그녀는 천국의 계단을 1400개 더 오르고,

아침에 못했던 복근 운동 루틴까지도 마무리한다. 이쯤 되면 병이다.


그녀는 '잘 하고 싶은 마음' 이 정말 큰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고, 이런 사람을 사랑하고 닮아갈 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녀는 내가 어쩌면 그렇게 루틴을 따박따박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신기하다고 칭찬해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런데 나는 오늘 그 칭찬을 듣자마자 아침 루틴을 보기 좋게 놓쳐버렸다. 민망하기 짝이 없다.


몸이 피곤했는지 오늘은 평소처럼 7시간 반이 아니라 8시간 반을 자버렸다.

나의 늦잠에 놀라고 신경쓰였을 그녀가 모닝콜도 울려준다.

한 시간 늦게 일어났지만, 상사는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8시 10분에 안전하게 출근했다.

민망해하는 나에게, 그녀는 내가 1시간 더 자니까 너무 좋다고 오히려 더 기뻐해준다.


그녀는 내가 이틀 정도 브런치에 쓴 글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아있으니 내 기분을 걱정해준다.

내가 기분이나 컨디션이 다운되었나 걱정이 되는지, 그녀는 사진도 열심히 보내주고,

평소보다 자주, 또 길게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해준다.


커피숍에서 시킨 커피에, 바리스타가 하트 모양을 만들어준 것을 찍어보내주며,

그녀의 나를 향한 마음이라고 고백해준다. 감동이다.

그녀의 귀여운 표현으로는, 나를 풀어주기 위해 오늘 열심히 '알랑방귀' 를 뀌었단다.

그녀의 말도, 그리고 그 고운 마음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사실 이틀전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로 사과하고 곧바로 괜찮았는데, 신경쓰게 해서 미안하다.

날카로운 말로 찌른 사람은 나인데, 그녀가 나를 위로하고 안아주고 있다.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고, 부끄러울 점이 한 점 없는 사람이 나에게 먼저 고개 숙여주고 있다.

나 정말 이렇게 훌륭한 사람에게 이렇게 사랑받아도 괜찮은걸까.


4월 중에 같이 살기로 했다.

행복하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아니 초심보다 더 사랑해주고 싶다.


나는 내가 초심을 잃었나 종종 돌아본다.

'초심은 잃으라고 있는 것' 이라고 그녀는 부드럽게 껴안아주곤 했지만,

일자리를 간절히 원할 때도, 그녀와의 미래를 간절히 원할 때도,

'초심을 잃는 순간 나에게서 모든 것을 뺏어가신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다' 라고 기도했던 나이기에,

최대한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물론 그녀 앞에서는 딱히 '노력' 할 필요도 없다.

그냥 그녀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 얼굴만 봐도, 초심이 끊어오른다.

내가 왜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지 내 자신이 새로이 설득된다.

백만명이 백가지 말로도 설득할 수 없는 편협하기 짝이 없는 내가, 그녀만 안으면 녹아내린다.


내가 스스로 '초심' 을 잃었나 돌아보기에 제일 좋은 장치가 있다.

그녀는 이미 나에게 손편지로, 나를 만난 이후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고 전해줬다.

나를 만나기 전의 그녀의 이상형은 '진보와 보수를 구분 못 하는 사람' 이었는데,

아래와 같이 이상형이 바뀌었다고 몇 장에 걸쳐 그녀의 이상형을 설명해줬다.

나는 이 리스트를 스프레드시트에 정리해놓고, 생각날 때마다 보곤 한다.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라는 말을 접두어, 접미사처럼 쓰는 사람

나 이런적 처음이야, 라는 말을 내 입에서 수도 없이 나오게 만드는 사람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서 말하는 사람, 문자에 비문과 오타가 없어서 읽는내내 내 눈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그 공간에 생명이 있는 존재는 나밖에 없는 것처럼 따뜻한 눈빛으로 봐주는 사람, 그래서 내가 정말 예쁜줄 착각하게 만드는 사람

함께 하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리는 사람

믿고 따르라는 말을, 배려로 들리게 하는 사람

6년 동안 단 하루도 내지 않은 휴가를, 날 위해 일주일이나 내는 사람

업무는 1분 단위로 계획해서 처리하지만, 나와의 통화에는 1시간 넘게 할애해주는 사람

엄청난 업무량에도, 나에 맞춰 회의 시간을 조정하는 사람

아무 상관없는 좋은 일이 다 내 덕이라고 연결 짓는 사람

어딜 가나 리더 역할을 하고, 그 모임의 모든 이성들의 고백을 한 몸에 받는 사람

말하는 중간중간 교훈을 정리해주는 사람

이미 온 세상을 다 줬다고 말하는 사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도록 만드는 사람

공항에서 와인 들고 기다리는 사람

3살에 한글을 깨치고, 12살의 나이로 등단, 줄곧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다가 18세의 나이에 소년급제한 천재만재

공룡과 어류의 학명을 줄줄 외우는, 세계인 가운데서도 으뜸인 인재

매일 일기를 쓰던 어린이가 매일 편지를 써주는 어른으로 성장한 사람

나의 노래 고백에, 그 노래 가사가 적힌, 긴팔소매 옷이라 업무 복장으로 손색없는, 예의있는 티셔츠를 사는 사람

새로 산 내 달리기용 전자시계가 수면상태 캐치를 못하는 것은 주인이 잘 때 헤드뱅잉을 심하게 해서 그런것 아니냐는 냉철한 분석을 내놓는 사람

두 시간을 쉴새없이 재잘재잘 말하고, 갑자기 뭔가 말실수를 한 것 같다고 후회하는 패턴을 반복하는 사람

익숙한 것을 좋아하지만 나랑은 기꺼이 새로운 것을 해보겠다고 말해주는 사람

메시지의 마무리가 꼭 '사랑해' 여야 한다고 신경을 쓰는 사람

둘이 같이 있게 되면, 혼자 있을 때보다 덜 피곤하고, 더 편하게 해주겠다고 장담하는 사람

서로를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사람

내가 값진 상이고, 트로피라고 말해주는 사람

매일 더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사람

정신없이 바쁜 중에도, 우리의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시간을 쪼개 노력하는 사람

잠을 많이 자라고 해놓고, 통화하느라 잠자는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

표현을 예쁘게 해서, 나까지 물들게 하는 사람

'Evocative' 라는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알려주는 사람

코인 사러, 손잡고 코스트코 갈 생각에 웃음이 난다고 말하는 사람

칼춤을 추고 싶다고 했더니, 칼집이 되어주겠다고 말하는 사람

내가 애쓰고 살았다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

나의 성장이, 자기의 세계가 성장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말해주는, 그래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

그 동안, 오랜시간, 정신없이 일하고 참아내느라, 몸이 피곤한지 아픈지도 모르고 살다가, 이제야 알아낸 사람

그런데, 아무 취미도 없이 일만 했다더니, 되팔 게임기가 9개나 되고, 비싼 스피커도 엄청 많고, 알면 알수록 취미 부자인 사람

취미 부자라서 새로 나온 게임도 해야하고, 신보도 들어야 하고, 하고 싶은게 많은데, '자걈, 자야지' 하면 곧바로 '넵' 하는 사람

초반에는 활동적인 사람으로 보이려고, 골프/테니스 사진 보냈는데, 정말 딱 한 번만 하고 그 뒤에 절대 다시 했다는 말이 없는 사람

포옹하고 있는 연인 둘 중 한 명은 거짓말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 작품을 보고, '거짓말' 처럼 사랑하는게 아닐까, 라고 해석하는 사람

시간이 생기면 뭐하는지 모르는 사람을 한심하게 보지 않는 사람

내 문자메시지에 빨리 대답해줘서, 엄청 신경쓰고 있구나, 느끼게 해주는 사람

평생 술을 안 먹었지만, 같이 술을 마셔주겠다며 벌써부터 장바구니에 와인 골라놓는 사람

죽기 전에 내가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고 내 모든 걸 주었다고 당당하게 말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


다행히 한두가지 빼고는 오늘까지 잘 지키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이상형 편찬 작업' 이라고 칭했지만,

누가 봐도 알겠듯이, 이건 그녀의 '이상형' 리스트가 아니다.

그녀가 나를 깊이 관찰하고, 사랑을 느끼고, 내게서 고마웠던 부분들을 놓치지 않고 알아준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나의 모습' 리스트이다.


그녀의 이상형에 내가 맞아들어간 것이 아니라,

나에게 그녀가 자신의 모든 걸 맞춰준 것이다.


이상형 리스트를 읽으며 더 느낀다. 그녀는 그녀의 삶의 일부만이 아니라 전부를 나에게 맞춰줬다.

그녀는 내가 살면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줬다. 나를 이해해줬다.

얼마나 큰 희생과 헌신이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내 눈 앞을 가린다.

집안에 우환이 있는 사람처럼 지금도 이 글을 쓰며 질질 짜고 있다.


나는 말로만 그녀에게 가장 큰 '이해' 를 선물로 주겠다고 하고, 그녀를 이해 못 해줄 때가 많았다.

나는 왜 이리 '옳으려고' 할까. 왜 그리 승자가 없을 싸움을 할까.

오직 그녀가 나의 '목표' 라고 하면서, 왜 다른 길로 새는 걸까.


잘 하고 싶다.

그녀만큼 잘 하고 싶다.


그녀는 도대체 나를 왜 이렇게 사랑해주는 걸까.

질 수 없다. This is a competition.

두고 보자. 갚는다. 안아주고, 본받아서, 복수한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의 그녀는 나의 컨디션을 신경써주는 모습을 안아주고 싶었고,

자기 자신에게는 가혹하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관대한 모습을 본받고 싶었고,

나와 함께 살 생각에 즐거워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전 17화February 19,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