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싱그러운 토요일 아침.
다음주 주말 그녀와 여행을 떠나기 전, 따로 지내는 마지막 주말이다.
그래서 더욱 신나고, 마음이 부풀어오른다.
그녀와 한강변을 러닝하거나, 다른 좋은 곳을 Trekking 할 계획으로,
그녀의 Garmin 스마트워치도 찾아서 봇짐에 챙겨둔다.
아무리 찾아도 충전기는 보이지 않는다.
충전을 못 해서, Garmin 을 쓸 수 없으니, Trekking 을 포기하는 그림이 또 될 것이 자명하다.
둘이 있으면 이상하게 계속 누워있게 된다. 혹은 앉아있게 된다.
그녀는 내 쉼터이기 때문이다.
나에 비해 100배는 부지런한 그녀는 아침부터 천국의 계단을 30분씩이나 오른다.
나는 20분만 타도 단테의 신곡의 지옥문을 보게 되던데.
이렇게 부지런히 자기관리하는 그녀 덕에, 그녀를 볼 때마다 나는 천국을 맛본다.
나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라며 그녀가 알려준 노래,
Bruno Major 의 Nothing 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녀.
요즘 잘 듣지 못했는데, 나도 오랜만에 들어본다.
"Have I told you lately I'm grateful you're mine?" 이라는 가사가 오늘따라 와닿는다.
그녀가 나의 사람이어서 감사하다고, 마음을 전해본다.
그녀도 나도, 토요일이지만 정시에 출근.
길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고, 회사에 업무상 찾아올 사람도 없어지는, 한산한 분위기.
그녀는 소소하지만, 꾸준히 전진하고, 진전해 나가는 하루를 보낸다.
무탈한 하루를 보내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
2025년 한 해를 보내며, '무탈하게' 산다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걸 느꼈다.
그리고 먹고 사는 데에 문제가 없이, 일용할 양식에 대한 염려가 없이,
건강한 두 팔과 두 다리로 걸어다니고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녀와 통화를 하는데, 공중의 새 소리가 났다.
공중의 새를 봤다.
새들은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지만, 잘만 살아가고 있다.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염려함으로 한 톨이라도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수고하지 않아도, 들판의 백합화는 솔로몬의 영광보다도 화려하게 자라난다.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녹슬고 망가지는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 은혜롭다.
내일 일은 내일 일이 염려할 것이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보며,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세상 그 무엇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저 새처럼 지금 날아가고 싶을 뿐.
한 시간이 넘도록 통화를 하는데, 오늘도 나는 기분이 지나치게 좋아서,
토크 지분의 85% 를 차지한다.
그녀가 발제하지만, 필리버스터는 내가 한다.
그녀가 오늘 본 영화, Past Lives 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나도 2023년에 본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10점 만점에 7.5점. 수작.
미국 독립영화 배급 전문회사인 A24 에서 나오는 영화는 다 보는 편이라, 흥미롭게 봤다.
A24 의 작품들은 최근에 재밌게 본 We Live in Time 이나 The Brutalist 도 좋았지만,
내게 압도적으로 9점짜리 영화들을 많이 공급해준 회사다.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The Zone of Interest, The Whale,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Midsommar, Hereditary, Lady Bird 등.
다만 Past Lives 는 A24 의 다른 작품 '미나리' 처럼 한국계 배우들이 나오고,
셀린 송이라는 한국계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이기 때문에, 2023년 개봉 당시 곧바로 찾아봤다.
나는 그 영화에 대해 쓸데없는 이야기를 그녀에게 아는 체를 하며 또 주욱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주인공의 남편이, 여주인공을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모습을 언급한다.
그녀의 시선이 참 아름답다.
영화에서, 남편 Arthur 는 여주인공 Nora 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눈다.
(영화 대본 링크: https://deadline.com/wp-content/uploads/2024/02/Past-Lives-Read-The-Screenplay.pdf)
Arthur: Do you know that you only speak in Korean when you talk in your sleep?
Nora: I do?
Arthur: Yeah. You never sleep talk in English. You only dream in Korean.
Nora: I didn't know that. You never told me.
Arthur: Most of the time I think it's cute, but sometimes -- I don't know -- I get scared.
Nora: Why do you get scared?
Arthur: You dream in a language that I can't understand. There's this whole place inside of you where I can't go.
법적으로 가장 가깝다는 부부 사이에서, 서로 간에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더 운명적으로 살았다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걱정하며 질문하면서도,
Arthur 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웃음 짓는다.
영화에서는 배우들의 연기로 보여지지만, 대본에는 대놓고 '두려움과 외로움' 이라 써있다.
Arthur turns to Nora and gazes at her.
He tries to smile a little to hide his fear and loneliness.
Arthur: I think that's why I've been trying to learn Korean, even though I know it's a little annoying for you.
Nora: You want to understand me when I'm dreaming?
Arthur: Yeah.
그녀의 시선으로 돌이켜보니,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Arthur 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잠꼬대까지 이해하고 싶다는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나도 그녀에 대해서 알고 또 알아도 부족하다.
그 갈증을 느낄 때, 나는 진정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다.
A24 를 통해 같은 감독, 셀린 송 씨의 후속작으로 개봉한 Materialists 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다코타 존슨, 크리스 에반스, 페드로 파스칼 등 할리우드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배우들은 다 나오는,
초호화 캐스팅이지만, 평이 별로 좋지 않아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사실 그녀를 만나고 나서 영화에 대해 관심이 좀 떨어졌다.
한때 영화평론가를 꿈꿨을 때는, 개봉했다는 모든 영화들을 혼자 다 보러 다녔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고 난 후로는, 일상이 너무 영화 같아져서, 그녀의 취향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슬픈 영화, 무서운 영화, 우울한 영화, 잔인한 영화, 느와르 영화, 액션만 있는 영화 등도 좋아했는데,
그녀를 만나고 나서는 밝은 미래와, 꿈과 희망이 가득찬 낭만적인 영화 말고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녀를 만나고 음악도 잘 듣지 않게 됐다.
평소에는 내 귀가 먹먹할 때까지 크게 음악을 틀고, 심지어 잘 때도 음악을 틀어놓고 자곤 했지만,
그 어느 음악보다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그녀와 함께 있으니,
아무 소리도 없는 채로 그녀와 입을 맞추는 것이 제일 행복해졌다.
클래식 음악과 뮤지컬, 발레 등을 좋아하는 그녀의 취향 덕에,
나도 고상한 척 문화생활을 더 할 수 있게 됐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변할 수 있다면, 변하게 해주는 유일한 존재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나를 바꿔놓았고, 나를 위해 그녀도 변했다.
오늘도 그녀를 닮아가고 싶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의 그녀는 고요한 토요일을 보내는 모습을 안아주고 싶었고,
나를 만난다는 생각만으로 신이 난 모습을 본받고 싶었고,
그 어떤 영화보다 영화 같은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