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2, 2026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

by 헤매이는 자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월요일이 왔다.

오늘도 열심히 일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연애 초반부터 자신의 성적 취향을 알려줬다.

"열심히 일하는 똑똑한 남자에 정신을 못 차린다" 고 말해줬다. 정말 건강하디 건강한 취향이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똑똑하지는 못해도,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한결같이 나를 사랑해줬다.


그녀가 그런 취향을 가진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바로 그녀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전문성을 갖추고, 읽고 쓰는 일에 병적으로 몰두해온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성장하지 못하면 자책하고,

꾸준한 루틴을 중시하며, 같은 자리에서 같은 동료들에게 충성을 다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녀는 오늘 신문에서 봤던 '후덕죽 사고' 라는 말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나는 시즌1 도 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지만, 요즘 제일 인기 있는 '흑백요리사' 에 나온 셰프님이다.

후덕죽 셰프가 보여준 훌륭한 인격과, 연장자인데도 기꺼이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궂은 일을 도맡아 했는지에 대한 글인 것 같다.


물론 모든 셰프는 요리를 잘한다는 전문성을 기본으로 두어야, 부차적인 부분이 더 빛나게 마련이다.

후덕죽 씨가 워낙 요리에 있어 성취한 것이 크기 때문에, 이런 칭송도 들을 수 있으리라.

잘 웃기는 코미디언은 더 예뻐 보이게 마련이고,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장미란 씨는 아름답다.

그녀가 좋은 기사를 읽고 설명해준 덕에, 오늘도 나는 좀 더 세상 이치를 깨닫는다.


내게 와닿은 그녀의 말은,

"존경받는 어른은 실력과 내공, 겸손함과 자신감, 지혜와 여유" 를 갖춰야한다는 말이었다.

그녀 자신은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한 자책도 당연히 뒤따른다.

내가 보기엔 그녀는 이미 실력과 내공이 가득한데, 그에 비해 지나치게 겸손한 사람인데.

그래서 내가 본받고 싶은 사람인 것이고, 내게 힘을 주는 사람인 것인데.


나는 '전문성' 을 중요시하는 그녀와 같은 사람을 평생의 배필로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잘 생긴 것이 업인 사람이 잘 생긴 것은 전문성으로 칭찬받아 마땅하며,

아무도 쓸모 없다고 여기는 일이라도, 그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자랑스러워할만 하다.

타인의 취향에 동화될 필요는 없지만, 지나치게 불법이거나 저속하지 않은 이상 배척할 이유는 없다.

내가 관심이 없고 모르는 분야라고 무시하는 것은, 인지적 오만이며 성장 기회의 상실이다.


특히 한국처럼 유행에 민감한 사회에서는, 한때 무시받던 분야나 직업도 인식이 달라지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오락실' 은 '두뇌 계발' 이라는 사인 아래 학교폭력이 이뤄지던 곳이었다.

게임은 사회악이었다. 하지만 이젠 '프로게이머' 가 엄연한 직업이고, 게임을 안 하는 사람이 없다.

'게임할 시간에 책이나 더 읽어라' 라는 말이 무색하게, 작년 게임산업은 출판사업의 5배 매출이다.


현대사회에서 요요를 잘 한다고 실생활에 크게 쓸모가 있지는 않고 손가락질 안 받으면 다행이지만,

손목이 부러지도록 연습해서 요요경연대회에서 1등을 한 사람은 당신보다 열심히 살아낸 사람이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살상무기였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요요이지만,

어른이 다뤄도 어린 아이들의 유치한 장난감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한국은 일본, 미국에 비해 관심이 적은데도, 국제경연에서 다종목 우승을 한다.


나는 책상 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게 취미이자 특기인 사람이라, 서브컬쳐에 파고 들었다.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집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미디어를 파고 들어 향유하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분야에 '매니아' 가 되고 싶었고, '오타쿠' 이자 '너드남' 이 되고 싶었다.


매주 흑인음악 신보를 전부 찾아듣고,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모든 영화를 싹 다 관람하고,

애니메이션도 찾아보고, 새로 발매된 시계의 모델명들을 달달 외우고, 신작 게임들을 다 모았다.

좋아하는 게임에 관련되거나 한정판으로 딸려오는 피규어들을 수집하고, 사운드 시스템을 구축했다.

내가 직접 본 고흐와 모네의 그림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아직 보지 못한 작품들을 찾아봤다.

컴퓨터 CPU 와 GPU 의 각 모델의 클럭, 코어, 스레드를 다 외우고, 직접 조립과 수리를 하곤 했다.


나만의 취미생활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왜냐하면, 직접 한 번 부딪혀봐야,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게 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막상 한 번 해보니,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알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 자신의 호불호를 알아가는 작업이다.


나는 영화든 소설이든 게임이든, 판타지 세팅을 정말 좋아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영화든 소설이든 광적으로 좋아했으며, 대부분의 롤플레잉 게임을 섭렵했다.

그래서 사람들끼리 만나서 연기하며 플레이하는, 보드게임/테이블탑으로서의 던전 앤 드래곤이나,

직접 피규어를 깎고 도색한 워해머 40k 까지도 손을 대보기도 했다.


하지만 직접 게임 스토어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 롤플레잉을 하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일단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재미가 없었고, 집 밖으로 나가기 귀찮았다.

결국은 Critical Role (미국 프로 성우들이 모여 던전 앤 드래곤을 플레이하는 방송) 을 시청하는 게,

내가 직접 플레이하는 것보다 내겐 백배는 재미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문성' 을 알아볼 줄 알고, '다양성' 에 열려있는 그녀란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나는 생각치도 않은 다양한 업계의 이야기를 듣고, 나란 사람의 지평선이 더 넓어질 수 있었다.

발레 공연이나 뮤지컬과 같은 전혀 무지했던 분야에 대해서도 더 관심을 갖고 즐길 수 있었고,

가족들이 클래식 음악을 했기 때문에 반대급부로 싫어했던 클래식 공연도 그녀와 함께 가게 됐다.


나와 여가 시간을 즐기다 보니, 그녀도 평소에 혼자 하지 않을 경험들을 시도할 수 있었다.

워낙 세간의 화제이다 보니, 그녀는 만화책도 본 적이 없는 '귀멸의 칼날' 을 영화관에서 봤다.

나는 관심이 많았지만 생각도 못했는데, 오히려 그녀가 먼저 제안해서 보게 됐다.

처음 보는 그녀의 기준엔 잔인하고, 왜색이 짙기도 하고, 앞뒤로 스토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전형적인 주간 소년 점프 잡지의 배틀물이자 '쇼넨(少年, Shōnen)물' 이라, 잘 볼까 걱정했다.


그녀 덕에 보게 된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만화책의 무한성을 초월한 대단한 영상미였다.

손 그림에 담긴 열정을 디지털로 꽉 채워넣는다는 느낌으로, 일단 디지털로 비주얼을 구축했다.

그리고 컴퓨터 렌더링 계산을 했을 때 10년은 걸린다고 나온다는 말에 손으로 다 그렸다고 한다.

라이팅(lighting) 부터 콤포지팅(compositing) 까지 정적인 작품과 애니메이션을 연결하고,

결전의 무대가 되는 무한성의 구조를 다 손으로 그린 후 파워풀한 카메라 워크로 표현했다.


모든 프레임을 컨트롤하기 위해 원화를 모두 손으로 그리고,

정말 순식간의 0.n초 단위로 정밀하게 특수효과를 컨트롤한 것이 느껴지는 영상이었다.

나중에 직접 찾아보니, 보통 3초의 전투 영상에 몇백장 대의 그림을 갈아넣었다고 한다.

그 압도적인 밀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2차원의 화면에서, 3차원의 깊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을 작업하는 사람들의 일은, 정말 1픽셀 단위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 장면은 이런 식으로, 이런 선을 쓰는 게 더 잘 표현되지 않을까' 라든지,

'이 선이라면 이 씬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픽셀 단위로 봐야한다.

한 컷마다 수백명이 며칠을 달라붙어야 하는 일이고, 그려도 그려도 끝나지 않는 일이다.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의 내용이나, 영화로서의 완성도를 떠나서,

각 전투와 기술마다 느껴지는, 전문성이란 단어를 뛰어넘은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돈을 얼마나 버느냐를 떠나서, 40년간 한 자리에서 초밥을 잡아온 대가의 손길 같은 것이며,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기계 부품 등을 돋보기, 아니 현미경을 통해 깎아나가는 고집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그런 전문성을 감상하는 것은, 내게 참 뜻깊고 즐거운 일이었다.


내 인생의 목표는 내가 존중할 수 있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통해 이미 내 삶의 목표를 이뤘다.

그리고 나의 새로운 목표는 그녀가 그녀의 삶의 목표를 이루는 것이다.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고, 그녀는 삶의 목표가 단순한 한두가지는 아닐 사람이기 때문에,

그녀의 모든 목표를 다 알 순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정 행복한 삶을 살고 꿈을 이뤘다는 느낌을 받으려면,

그녀는 영향력 있고, 전문성 있고, 자신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하는 사람이란 사실이다.


이번 년에 그녀는 꼭 지금 하는 일을 잠시 내려두고, 더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녀가 근미래에 어떤 일을 할지, 그리고 얼마나 멋진 모습으로 자신을 가꿔나갈지, 기대가 된다.

꼭 금전적으로 성공하거나, 만인의 칭찬을 받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일 것이다.


물론 매일 스스로 부족하다고 자책할 것이 뻔하긴 하다. 그 점이 조금 걱정되긴 한다.

은근 내향적인 사람인데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백만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일정에서,

'후배들에게 시간 쓰기' 라는 새해 목표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워한다.

시간과 몸과 마음이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 같은데, 더 시간을 내야겠다니 참 못말린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그것이 그녀의 취향이고, 그녀의 취미이자 특기이며, 본성이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친한 후배에게 24k 금으로 된 장미를 생일선물로 받았다.

이런 좋은 대접을 받는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 잘 알 수 있다.

"계신 것만으로 마음이 든든하달까요? ... 선배님을 좋아하는 후배" 라는 편지글로 확인 사살.

그녀는 이런 사람이다.


그녀를 만나고, 나는 나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나의 취미는 그녀다.

나의 특기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고,

나의 본성은 그녀를 원하는 것이며,

나의 천성은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내 삶의 의미는 그녀라는 존재가 없으면 시들해져 버리고,

혹자가 아무리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한들,

내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그녀로만 가득 채우는 것이 나의 취향이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해도 그녀 없이 혼자 하면 재미가 없는 것이며,

아무리 내가 처음 해보는 일도 그녀와 함께 하면 세상에서 제일 익숙한 것이다.

혼자서는 절대 해보지 않았을 취미를 그녀 덕에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내가 이미 전문가 수준으로 알고 있는 것도 그녀의 새로운 시선으로 새로이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오늘도 그녀의 꿈을 어떻게 이뤄갈지 상상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의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깎아나가는 모습을 안아주고 싶었고,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본받고 싶었고,

완벽히 사랑받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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