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
그녀의 손편지들을 회사에 두니, 일에 지칠 때마다 볼 수 있어서 좋다.
창고에서 곶감 빼먹듯이 - 그녀가 알려준 표현이다 - 꺼내보는데, 볼 때마다 행복하다.
이런 재밌는 표현 뿐 아니라, 그녀의 말과, 글과, 행동에서 많은 것들을 배운다.
최근에는 그녀에게 '거안제미 (擧案齊眉)' 라는 고사성어를 배웠다.
부부가 서로 공경함으로써 신뢰를 쌓고 화목한 가정을 만든다는 의미는 좋지만,
아내가 남편 눈썹 높이만큼 밥상을 받들어올린다는 개념은 2025년에는 시대착오적인데,
그녀는 독립적이다 못해 남부러울 것 없는 신여성이면서도,
항상 내 눈썹보다 더 위로 밥상이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고마운 일이다.
어제 읽은 그녀의 편지에서는 '섭동 (perturbation)' 이라는 개념을 그녀에게 배웠다.
인문학적인 의미로도 쓰일 수 있지만, 천문학, 물리학, 수학,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에너지가 안정화되어 있는 계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 상호작용을 해 변한 상태를 뜻한다.
천문학적으로는, 행성이 움직이다가 다른 행성의 영향권에 들어가서 서로의 궤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섭동 이론에 관련된 수많은 방정식들을 즐겁게 - 물론 머리 아프게 - 읽고 있노라면,
나라는 계가, 그녀로부터 영향을 받아 상호작용을 하며 변하는 것이 느껴진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받고,
그 덕에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고, 그게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는-
이 과정이 참 매력적이라고 느끼고, 꼭 그런 사람을 만나기를 바랐던 그녀였다.
그리고 나를 만나서 '운명의 섭동' 현상을 겪는 것 같다고 말해줬다. 눈물이 날만큼 고마웠다.
정작 '섭동' 을 나에게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이다. 그녀는 나에게 선하고 좋은 영향만을 미쳤다.
나는 그녀를 만나서 더 좋은 사람이 됐다.
그녀는 머리가 섹시한 사람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가고 싶다.
그녀의 모든 구석구석을 탐닉하고 싶다.
그녀를 닮고 싶다. 모든 일은 진심을 담아 꾸준히, 습관처럼, 오랫동안 숙련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인생 몇십년간 한 가지 일을 루틴으로 삼아야한다면, 난 무엇을 하고 싶을까 생각해봤다.
나는 앞으로의 40년을 그녀를 닮는 데에 쓰고 싶다.
그녀를 닮는 일에 있어, 그 누구보다 달인이 되고 싶다.
앞으로 몇십년을 죽을 때까지 그녀를 닮는 데에 정진할 생각을 하니 너무나 즐겁다.
같은 종류의 일을 몇십년 동안 이어간다는 것은 기품 있는 일이고, 존경받을 일이다.
최근 오페라 투란도트를 관람하며 사은품으로 한강 씨의 책 "회복하는 인간" 을 받았다. 2001년작이다.
한강 씨는 1992년에 연세문화상에서 시 부문인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하고,
1993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본격적인 등단 후 30년이 걸려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어제 본 영화 "배심원 #2" 를 감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71년 첫 영화를 감독했고,
50년이 넘도록 감독 활동을 하며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사생활 문제도 있고, 그가 연기하거나 감독한 영화가 엄밀히 말해 내 취향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평생을 영화라는 매체에 바친 그 점은 크게 존중할만 하다.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그가 인생의 마지막 감독작이라고 공언한 "배심원 #2" 를 감상했다.
내 향후 몇십년의 프로젝트가 그녀와 같이 근사한 사람을 닮는 일이라니, 나는 운이 좋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 부작용이 있었다.
그녀가 없는 장소, 그녀가 없는 일상, 그녀가 없는 하루는 상대적으로 빛이 바랬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와의 날들이 너무 찬란했기 때문에.
나도 그녀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싶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있지만, 오늘도 1시간 반 가까이 그녀와 통화했다.
그녀는 내가 떨고 손가락이 얼까봐 걱정해주며, 전화를 줄이자고 한다.
걱정해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거짓말이 아니라 몸에서 열이 나고, 마음에서 열이 난다.
다른 건 양보해도, 그녀와의 통화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덜 걱정할 수 있는, 더 따뜻한 장소를 찾아보기로 한다. 그녀의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나를 뜨겁게 빛나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