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6, 2025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Pantone 에서 올해의 색깔로 모카무스색을 선정했다. 톤 넘버 17-1230.
그녀와 참 잘 어울리는 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고급스럽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운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녀는 귀찮음을 뚫고 출근한다.
고급스럽고 달콤하고 부드러운만큼이나, 처절하고 쓰디쓰고 강인한 사람이다.
매일 열심히 사는 내가 대단하다고 말해주면서도, 본인이 더 정신이 없고 바쁜 날을 보낸다.
주말 내내 회의하고, 갑자기 일정들이 생겨서 방문을 다니고,
동료들이 '왜 이러고 살아야할까' 하는 오오라를 풍겨도,
즐거운 시트콤에서 우당탕탕 해프닝 정도 일어나는 것마냥, 목소리를 들어보면 밝음 그 자체이다.
그녀의 몸과 마음이 괜찮은지, 어떤 음식을 먹고 다니는지,
솔직히 너무 신경이 많이 쓰인다. 그래도 너무 불편하지 않도록 조금 자제하고 있다.
그녀는 요즘 내가 그녀를 좀 더 편하게 해준다고 고마워하지만,
내가 그녀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나에게 편한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며,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다.
그녀 덕에 불편함이 없고, 부자연스러움이 없고, 자유가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그녀의 사랑의 방식을 따라해보고 싶을 뿐이고, 나만큼이나 편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불편한 것은 죽기보다 싫다.
그녀가 진정한 자유를 지녔으면 좋겠다.
매사에 자유롭게 하되,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선의의 의미로 이렇게 얘기해줬지만, 그녀를 세뇌시키려는 음모가 있음을 그녀는 역시 포착해낸다.
속일 수 없는 그녀. 세상에 그 어떤 아픔이나 어려움이 없다고 계속 속이고 싶다.
거짓말 같은 사랑을 내게 줬으니까.
그녀는 힘든 것도 다 까먹는 사람인 것 같다.
추억을 보정시키는 건지, 미화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눈물이 날만한 이야기조차 별 일 아니었다는 듯 손사래 치며 '그만 이야기하자' 고 한다.
그 모든 이야기를 회고록을 엮어내듯 당당하고 즐겁고 부지런하게 펴내는 모습이 경이롭다.
주인공에게 시련은 필수 요소이다.
그녀는 주인공의 서사를 살아가는 사람일 게다.
그 서사의 조연이고 싶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성질의 일터에서 겪은 수많은 역경들과,
1년도 안 된 짧은 시간 동안 내가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불편하게 한 시간들도,
웃음과 위트를 섞어 언급하는 그녀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자주 나를 용서했는지 깨닫는다.
앞으로 몇십 년을 같이 살자고 이러고 있는데, 이대로라면 얼마나 더 자주 용서해야하는 걸까.
마음에 작게 걸리는 일이든, 크게 걸리는 일이든, 나에게 말도 없이 묵묵히 참아줬다.
나와의 사소한 오해이든, 진짜 잘못한 일이든, 생색 내지 않고 나를 그대로 받아줬다.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정재승 씨의 말이 기억난다.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 가장 많이 화를 낸다.
인간이 가까운 사람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그 사람과 나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사람과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무기력감 없이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다 ...
서로 각자의 삶을 사는 거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서로 행복할 수 있고, 어쩌면 그게 진짜 사랑인 것이다."
사랑한다는 명목 하에 나는 그녀를 불편하게 했고,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나를 끝까지 지켜줬다.
솔직히 이런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내가 목소리가 그렁그렁하려 하면 그녀는 언제나 '그만 해', '적당히 해' 라며 위로해준다.
왜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준 사람을 위로하고 있는 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더 사랑해줘야겠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 관심사에 대해서 파보는 것은 내 천성이라, 어쩔 수 없다.
관계가 멈춰있질 않는다. 그녀를 알고 싶다.
그녀에게 많은 이미지를 느끼지만, 오늘 점심식사가 담겨나온 그릇에 갑자기 떠오른 이미지가 있다.
그녀는 약 1200도 정도의 고온에서 천천히 잘 구워지면서 열 보존성과 내열성을 갖춘 뚝배기 같다.
그녀에게 담긴 음식의 숙성을 도와주고, 맛과 향을 더 풍부하게 하며,
탄탄하고 두껍기에 열을 가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뜨거워지고 나면 절대 쉬이 식지 않는다.
내가 뚝배기 깨질 소리(?) 를 해도 다 받아주는 그녀. 나에겐 그녀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그녀의 이런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것마냥 자꾸 마음 아프게 하기보다,
그녀라는 아름답고 큰 그릇을 아끼고, 기름칠하고, 정갈한 음식만 담아, 매일 함께 식사하고 싶다.
'사랑' 이 아닌 '집착' 의 모습으로 그녀를 불편하게 한 적이 많다. 1분 단위로 나의 연인 간 의무를 쟀다.
내 딴엔 내가 지켜야할 의무를 지킨다는 취지였지만, 결국은 그녀에게도 강요하는 모양이 됐다.
지금 돌이켜보면 도대체 왜 그랬나 싶다. 내 자신의 마음을 졸이고 졸였다.
그런 태도의 결과는, 안 좋은 방향으로 마음 졸이던 나 자신과, 그녀의 일상에 끼친 불편함이었다.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라서, 분명 앞으로도 내가 그녀를 좀 불편하게 할 날들이 오겠지만,
고치려는 노력도 없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 것이라 생각한다.
절대로 똑같은 불편함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그녀는 농담 반으로 '집착남편' 이 돌아오게 하겠다고,
"혼나기 전에 문자 써야지!"
"예전에는 사진 보내주고 하더니, 자기 변한 것 같아?"
"아참, 나 퇴근해서 집에 왔다고 말해야하는데 깜빡하고 말을 안 했네!"
라고 나를 괴롭힌다. 사랑스러워 죽겠다.
행복하다. 오늘도 그녀 덕분에 마음 졸인다. 애태운다.
데이트 장소에 10분 일찍 도착해서, 그녀가 언제 오는지 출입구를 바라보는 기분으로 마음 졸인다.
세상 그 어느 공항에서든, 까치발 들고 그녀의 얼굴을 찾아 헤매겠다. 나는 헤매이는 자이다.
불어오는 바람 어쩌지도 못한 채 그녀가 모진 세상에 칼을 휘두르고 퇴근하는 길,
정류장에서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알 수도 없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겠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의 그녀는 눈길을 뚫고 출근하는 모습을 안아주고 싶었고,
우리 관계가 망가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내게 자유를 주는 모습을 본받고 싶었고,
내 삐져나오는 천성을 애써 누르지 말라고 말해주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