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2, 2025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

by 헤매이는 자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녀는 오늘은 어머니에게 생일 축하를 받았다.

나와 가봤던 레스토랑과 커피숍에서 어머니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우리가 함께 보던 달이 뜨는 것을 바라보며 종일 내 생각을 해준다.


그녀는 이틀 연속으로 가족과 좋은 사람들에게 축하 받고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배부르다.

과학적으로는 잘 먹고 배가 부르고 몸무게가 늘어나면 기분이 더 좋아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기관리의 화신인 그녀는 너무 많이 먹었다고 오히려 조금 심통이 났다.

귀여워 죽겠다.


자기관리의 화신인 그녀를 본받아, 그녀를 보지 않는 날은 식습관과 운동습관을 들이는 중이다.

습관이란 신기하다. 좋은 습관이 들고 나면, 나쁜 것들을 자연스레 가려내게 된다.

열심히 일하는 날은 하루에 커피를 다섯 잔까지 마시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어제 부로 커피를 끊었다. 오늘부터는 탄산수도 끊고, 생수만 마시기 시작한다.

기분 탓이겠지만, 벌써 몸이 깨끗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녀와 어울리는 커피숍에서 곁에 앉아, 그녀와 어울리는 향의 커피를 마시기 전까지는,

물만 마시려고 한다.

그녀가 책을 잡는 순간 모든 커피는 안식처가 된다.

그러니 혼자 있을 때는 마시지 않겠다. 앞으로 그녀와 몇만 잔의 커피를 마셔야하므로.


영원히 그녀와 커피를 마시고 싶다.

나는 '영원' 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멸' 을 느낀 적도 있다.

'영원히 사랑한다', '우리 우정 영원하다', '우리 모임은 영원하다' 라고 미사여구를 쓰다가,

그 말들이 처참히 땅에 떨어지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광경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이미 그녀에게 '허언증 환자' 가 되어버린 나이지만,

'영원' 을 논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2024년 8월 17일 이후로, 나는 그녀와 나의 '영원' 을 감히 논하게 되었다.


2024년 8월 17일, 그녀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다가,

브람스가 태어난 1833년은 순조 33년이고, 한성 쌀폭동이 일어난 해이며,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한 1878년은 고종 15년인데, 이미 강화도 조약 이후라서,

이런 혼란한 시기에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는지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곡이 너무 꽉 차고 완결성이 있어서, 그림으로 치면 벨라스케스 같다는 느낌도 받는단다.


그녀는 그 날 집에서 혼술을 하며, 살짝 취기가 올랐다.

두서 없는 주제의 이야기들을 했다. 한옥 마당이 흙인 이유는, 열이 빨리 받아서 가열되면,

뒷마당의 시원한 그늘이 대청마루로 나오게 되는 원리라는 점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눴다.

뜨거운 공기가 위로 가면, 옆에 있던 공기가 딸려오게 되어있고,

한옥의 대청마루는 앞면과 뒷면이 트여있는 구조이며, 뒷마당은 보통 응달이란 얘기까지.


역사 지식과 교양이 넘치고 문화 전반에 식견이 넓은 그녀를 만나서,

나는 이렇게 나와 어울리지 않는 대화도 많이 하게 되고, 내 관심사도 넓어졌다.

그녀 덕에 호두까기인형 발레 공연도 처음으로 봤고, 오페라 공연들도 봤고,

공짜로 티켓을 받지 않는 이상 가보지 않은, 클래식 공연들도 직접 찾아보게 됐다.


그녀는 함께 보는 공연, 같이 먹는 음식, 손잡고 가는 여행지를 모두 환상의 세계로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런 그녀가 혼술할 때 곁에서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


"평생 취하게 해주고 사랑해줄게."

"알콜은 염증을 유발한다구. 제한해서 마셔야 해."

"응, 걱정마. 염증 유발하기 전에 이미 나한테 정신없이 안겨있을 테니까. 정신없게 사랑해줄게."

"그럼 좋겠다. 세상에서 제일 완벽한 사람, 제게 와줘서 고마워요."

"응, 난 너에게 다가가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아. 어떤 말도 행동도 날 밀어낼 수 없어. 끝없이 다가가서 안아줄게. 그냥 가만히 너인 채로 있어, 너 아니면 싫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나의 부탁 아닌 부탁, 소원 아닌 소원이라면, 잔다고 말도 없이 스르륵 자. 누워!"

"진짜로 옆에 누워 안겨있고 싶어요."

"응 자기야, 오늘도 고생 많았어. 지금은 곁에 없지만 우리 오래오래 앞으로 많은 밤과 아침들과 밝은 낮을 함께 하자. 사랑해, 자기야."

"진짜 사랑해. 언어 공부를 하다보면 왜 이렇게 많은 형용사들이 필요한가 했는데, 다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랬나봐. '진짜' 말고는 더 할 말이 없어."

"응, 하지만 우리는, 특히 자기는, 행동으로 나에게 더 보여주고 있어. 나도 더 행하려 해. '필요한 게 없다' 는 말이 입에 붙어있는 우리이지만, 필요한 게 없는 우리가 서로를 행동으로 채워주자."

"응, 근데 진짜 자기만 필요해."

"지금 곁에 없는 것 미안하고, 미안한만큼 더 고맙고 사랑하고 사무치게 보고 싶어요. 미안해하기보단 더 잘해주고 갚아줄 궁리를 할게."

"사실 눈물날 만큼 많이 보고 싶긴 하지만, 잘 참을 수 있어. 참는 거 잘해."

"언제든 너에게 달려갈 수 있단 거 기억해줘. 사랑해."

"네, 제가 그 말의 힘으로 잘 버틸 수 있어요. 그래도, 취기에 더 보고 싶은건 어쩔 수 없어요. 사랑해."

"응 자기야, 나도 보고 싶고 사랑해요!"

"영원히 변치 말아달란 말은 못하겠지만, 내가 잘 할게요."

"나 없으면 못 살게 해줄게."

"이미 그렇게 됐어. 눈물이 나지만, 난 잘 참을 수 있어."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기쁘고 감동받아서 눈물날 일이 더 많게 해줄게. 그리고 네 눈물은 내 입술로 닦아줄게."

"네, 세상에서 제일 믿어요."


난 '영원히 변치 말아달란 말은 못하겠다' 는 그녀의 말에, 그 날부터 영원을 조심스럽게 논하기로 결심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것은, 죽음과 세금 뿐이다.

헤어질 것을 아는 사람, 언젠가 없어질 물건, 크게 의미없는 현상에는 영원을 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와 같이 꿈 같은 사람과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원을 논하는 나에게, 그녀는 과분하고 넘치게 고맙다고 말해준다.

이런 말은 이제 막 첫사랑을 시작한 10-20대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진심을 다해 말해줘서 고맙고, 나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어졌다고,

나의 말투를 따라 그녀도 '꼭 그렇게 할 거야, 두고 봐' 라고 말해준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Grace 와 dignity 가 넘치는 그녀의 말들.

나는 처음엔 그녀의 kindness 와 decency 때문에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요즘은 그녀에게서 grace 와 dignity 를 많이 느낀다.

이런 사람과 영원히 있길 바랄 수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녀와 같은 사람을 만나니 매일이 배움의 연속이다.

나는 관심이 가는 주제에 대해서 편집증적으로 연구해보고 달달 외우는 것을 좋아한다.

인텔, 엔비디아, AMD, 퀄컴, 브로드컴, 미디어텍에서 나온 칩들의 제품명과 클럭들을 외우고,

모든 시계 브랜드의 모델명을 알파벳부터 숫자 하나하나까지 외우는데에 공을 들인다.


그녀와 작년 리움미술관에서 "드림 스크린" 이라는 기획전을 관람했다.

이 전시는 '스크린' 을 통해 접하는 광범위한 정보와 감각 자극의 서사로 '공포' 를 다뤘다.

'윈체스터 하우스' 라는 '귀신 들린 집' 을 모티프 삼아 전시 공간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미국 산호세 소재의 이 집은, 총기 사업으로 부를 일군 윈체스터 가의 부인이,

총기로 인해 사망한 이들의 혼이 자신을 찾아오지 못하도록 복잡한 구조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와 함께 미로 사이로 길을 찾는듯 움직였던 동선이 기억에 남는다.


이 구조물의 겉은 브루탈리즘 (Brutalism) 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콘크리트의 느낌이었고,

그녀는 '안도 다다오' 가 떠오른다며 그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해줬다.

그 이후로 나는 '안도 다다오' 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녀와 언젠가 함께 손잡고 가보기 위해,

서울식물원 내 LG아트센터라든가, 한국 내 안도 다다오의 작품을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브루탈리즘이라는 용어는 프랑스어로 노출 콘크리트를 의미하는 베통 브뤼트 (Béton brut) 에서 유래됐다.

건축 사조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나는, 아르 데코 양식이나, 커튼 월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그녀 덕분에 새로운 사조를 배우고 브루탈리즘의 영향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우연히도 2024년에 '오데마 피게' 에서 브루탈리즘에 바치는 헌사와도 같은 시계를 발매했고,

'톨레다노 앤 찬' 에서 내놓은 브루탈리즘 건축양식을 도입한 시계는 2024년 최고 히트작이었다.


그런 가운데, 일이 바빠서 생방으로 보지 못한 2025년 1월 5일 제8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브루탈리스트 ("The Brutalist")' 라는 영화가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석권했다.

제목만 듣고, 그녀 덕에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브루탈리즘' 과 관련이 있는지 찾아봤다.

건축 사조에 대한 명칭이 맞고,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태인 건축가가,

미국 펜실베니아 주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다뤘다고 한다.


오늘 티켓을 곧바로 예약했다.

내가 최근 제일 좋아하는 배급사 A24 다운 영화 같다.

나에겐 언제나 '미드나잇 인 파리' 에서의 살바도르 달리인 에이드리언 브로디 배우가,

출세작이라 부를 수도 있을 '피아니스트' 에 이어 다시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에 나온다니.

나의 인생 영화 중 하나인 '메멘토' 의 가이 피어스 또한 출연한다니.

이 영화가 골든 글로브를 탈 때까지 한 번도 듣지 못한 게 자괴감이 들 정도로, 기대가 된다.


그녀에게 '안도 다다오' 에 대해 듣길 잘했다.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길 잘했다.

그녀와 미술관을 거닐고, 그녀의 이야기 한 마디를 기억했을 뿐인데,

내 삶은 이렇게 풍요로워지고 다채로워졌다.

그녀는 만화경 같은 사람이다.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상상치도 못했던 환상적이고 기이한 풍경으로 빠져들게 하는 사람이다.


그녀가 지나치듯 내뱉는 한 마디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찾는다.

그리고 영원을 논한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의 그녀는 영원히 안아주고 싶었고,

죽을 때까지 본받고 싶었고,

두고 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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