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청령포를 걸으며
별다른 계획 없이 영월에 내려왔다.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면 어디든 괜찮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게스트하우스는 가기 싫었는데, 돈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가게 됐다. 가는 도중에 사람이 없어 방을 혼자 써야 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아주 좋았다.
60대로 보이는 서글서글한 주인이 날 맞았다. 반원의 검정 뿔테 안경이 잘 어울렸다. 희끗한 머리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어 세련돼 보였다. 푸른 계열의 패딩과 연갈색 긴바지, 초록색 운동화는 어딘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지만 나름 단정해 보였다. 전체적인 그의 인상은 편안했다.
일요일이라 사람이 없어 헛헛하지 않겠냐며 머쓱해하는 그의 표정에서 따스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나는 오히려 괜찮다고 말하고는, 시간이 애매한데 가볼 만한 곳이 있는지 물었다. 미소와 함께 그의 얼굴이 잠깐 환해졌다. 그는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로 가볼 것을 권했다. 게스트하우스에 책자가 있으니 그것을 들고 가면 좋을 거라고 말했다. 배를 타고 들어가는 곳이라 시간에 맞춰서 가야 한다고 했다. 시간이 남았으므로, 또 그의 말이 친절했으므로 그곳으로 향했다.
청령포에 혼자 온 이는 나 하나였다. 20대도 아마 희귀했을 것이다. 또래로 보이는 이들은 많아봤자 서너 명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특히 조부모 뻘 되는 분들이 많았다. 단체로 오신 모양이었다.
청령포는 설명돼 있는 대로 말발굽 모양의 강줄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단종은 고립된 채 살았다. 배를 타면서 강물을 내려다봤을 때 수심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바닥은 보이지 않았고 물색이 짙은 푸른색이었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때, 꽤 깊어 보였다.
과학의 발전으로 모터 달린 배를 나는 탈 수 있었고 청령포에 1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단종과 나의 차이가 있다면 아마 그것이었으리라. 강폭이 내겐 그리 넓지 않아 보였으나 단종에겐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을 대강 알아서 그런지, 청령포는 왠지 음울해 보였다. 초입부터 소나무가 빽빽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려 했지만 탁 트인 하늘을 보긴 어려웠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하늘로 솟아있었고, 계통 없이 뻗친 잎들이 하늘을 촘촘하게 사로잡고 있었다. 그 모습은, 역사적 배경을 알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으나 조금 기괴했다. 결코 하늘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청령포를 단단히 매어 두고 있었다. 계속해서 하늘을 보려 했으나 소나무들이 걸어 잠가놓은 빗장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마 이것은 나와 단종의 유일한 공통점일 테다.
유배지를 둘러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산책 코스로 훑으면 30분이면 충분했다. 그만큼 딱히 볼 것은 없었다. 둘레길을 거의 다 걸었을 때, 노부부가 지나가며 하는 얘기가 우연찮게 귀에 흘러들어왔다. 노부부는 단종에 아주 이입한 듯, 그가 느꼈을 좌절과 슬픔에 대해 얘기했다. 왕가의 분열로 역사의 희생양이 된 가여운 어린 왕을 그들은 안타까워했다. 온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수백 년도 더 된 역사의 한 페이지일 뿐이라는 얘기를 그들에게 해주고 싶었다. 어차피 일주일, 아니 하루만 지나도 그들은 단종을 까맣게 잊어버릴 게 자명하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됐다. 역사에 선과 악이 있을까. 나는 그저 방향만 존재하는 게 아닐지 생각했다. ‘방향’이란 단어 앞에 하나를 굳이 덧붙인다면 그건 아마 ‘힘’ 일 것이다. ‘힘’은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으므로 나는 역사에 선과 악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강한 자는 새로운 장을 열고 역사에 그의 이야기를 빼곡히 채워 나간다. 약한 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소멸됐거나, 왜곡됐거나, 남아있더라도 소수에 불과하다. 역사가 정의롭지 못한 시대의 연속이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도 세상이 온통 부조리와 비합리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며, 도덕과 윤리가 실종돼 가는 요즈음의 역사에 대해선 더더욱 끔찍하게 느낀다. 이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청렴포에서 역사 자체에 대해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나는 또 깊어질 뻔했다.
선착장으로 되돌아가던 중 돌무더기들이 있는 옆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곳은 돌밭이었고, 돌밭은 역사적 가치를 지니지 않으므로, 동시에 별 것 아닌 것이므로 사람들은 아무도 그곳에 가지 않는 듯했다. 내가 돌밭으로 향할 때, 관광객을 태운 배가 청령포 반대편으로 출발했다. 나만 청령포에 남았다.
선착장 오른쪽으로 쭉 돌밭이 이어졌다. 그곳 역시 말발굽 모양의 강줄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느 쪽에 서 있든,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청령포가 유배지라는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선착장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무렵,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 없을 만큼 풀들이 우거져 있었다. 별생각 없이 물수제비를 던졌다. 강기슭 가까이에 갈대와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새 몇 마리가 놀라 폴짝 날았다. 새들은 중간 고도를 유지한 채 선착장이 있는 왼쪽으로 유유히 날았다. 한 번 더 물수제비를 던졌다. 기러기였을까? 하얀 새 한 마리가 둥실 강 위로 떴다. 부드러운 날갯짓으로 새는 말발굽 모양의 강줄기를 따라 날았다. 새는 수면 가까이 날다가 점차 높이 날더니 어느 이름 모를 산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단종의 설움이 그때 어렴풋이 느껴졌다. 널린 게 돌뿐이니, 그도 강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을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돌을 던지다 보면 강가에 숨어있던 새 몇 마리가 퍼드득 날아올랐을 것이다. 단종도 나처럼 돌 던지기를 멈추고 새들을 멍하니 바라보지 않았을까. 새들이 사라지면 초라한 제 처지에 힘없이 다시 거처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지 않았을까.
앞서 역사란 그저 방향일 뿐이라고 했으나, 역사 속 개인은, 역사를 쟁취하지 못한 불행한 개인은 가엾다. 청령포의 끝자락에서 나는 다시 선착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의 소망이 담긴 돌탑들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만 그곳을 걸은 건 아니었나 보다.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누군가 세워놓은 돌탑 위에 돌을 하나 얹었다. 딱히 소원을 빌지는 않았다. 그냥 약간의 연민을 놓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