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삶을 쓴다
‘간사’라는 직함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 손에서는 수십억 원짜리 꿈이 담긴 회의 자료가 만들어지고, 제 귀에는 연구자들의 희망과 심사위원들의 날카로운 평가가 쉴 새 없이 오고 갔습니다. 저는 그 모든 과정을 회의록에 담담하게 기록하는, 타인의 꿈에 대한 가장 가까운 목격자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저는 이제 작은 중소기업의 ‘차장’이 되었습니다. 거창한 국가 과제 대신, 눈앞의 제품 불량률과 씨름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죠. 가슴 뛰는 설렘보다는 익숙한 책임감으로 하루를 채워가던, 그런 어느 날이었습니다.
퇴근 후, 초등학생 딸아이가 숙제라며 제 앞에 작은 노트를 펼쳐 보였습니다.
“아빠, 인터뷰 시간입니다. 질문에 잘 대답해주세요.”
“하하, 그래. 우리 기자님. 질문이 뭔데?”
딸아이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물었습니다.
“아빠의 진짜 꿈은 뭐였어요?”
‘진짜 꿈’.
그 한마디에, 제 마음속에서는 조용한 연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배우는, 낡은 시집을 옆에 끼고 별을 헤던 ‘문학 소년’이었습니다.
두 번째 배우는, 날카로운 눈으로 타인의 꿈을 평가하던 냉철한 ‘간사’였죠.
무대 위에는 잠시, 성공에 취해 웃음 짓던 ‘사장님’도 나타났다가, 모든 것을 잃고 고개 숙인 ‘채무자’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낯선 땅을 헤매던 ‘이방인’의 뒷모습과, 지금 여기 딸 앞에서 웃어 보이는 ‘아빠’의 얼굴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저였습니다.
저는 단 한 사람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안에는 수많은 ‘나’들이 각자의 무대 위에서 웃고, 울고, 버티고 있었던 겁니다.
‘평범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던 제 삶이, 실은 수많은 가능성과 자아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였음을, 저는 딸 아이의 질문 앞에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날 밤, 저는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이 모든 배우들의 대사를, 그들이 올랐던 무대를, 그 마음의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타인의 꿈에 대한 회의록만 작성하던 제가, 처음으로 제 삶에 대한 회의록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곳에 펼쳐질 《나를 만든 순간들》은 바로 그날 밤 시작된, 한 남자의 뒤늦고 서툰 자기 고백서입니다.
부디, 제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의 떨림에,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함께 실어주시길 바랍니다.
이 글에 보내주시는 응원은, 전액 '국경없는의사회'에 기부되어 세상의 아픈 곳을 밝히는 데 쓰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더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