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반도체는 어떻게 움직이나?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물질인 원자는 대부분 텅 비어 있습니다.
이렇게 따지면 원자로 구성된 세포도 텅 비어 있고, 세포로 구성된 심장도 텅 비어 있고, 결국 심장과 폐로 구성된 제 몸도 텅 비어 있습니다. 불교로 말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제법무아 (諸法無我)’ 입니다.
물리적 관점에서 봤을 때 내 몸이 없다는 무아는 말이 안됩니다.
내 두 눈으로 세계인이 환호하는 넷플리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을 보며 코딱지를 후볐던 손가락으로 감자칩을 맛있게 먹는 입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말이지요.
여기서 무아(無我)란 내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맛 볼 수 있는 물리적 육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나(我)라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 몸은 현재 이렇게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수한 인(因) 과 연(緣)들의 상호작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야심경’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260자의 부처님 말씀입니다. 반야심경 260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반야심경의 한 구절 ‘색즉시공(色卽是空)’은 한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아니면 색즉시공을 야한 영화 제목 으로만으로 기억하실지도 모르지요.
색즉시공에서 색(色)은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모든 유형의 사물’을 뜻합니다. 공(空)은 말그대로 ‘없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다’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유형의 사물은 텅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공의 의미를 다시 깊게 생각해 보면 공은 없다는 의미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사물이 공하다는 색즉시공의 의미가 바로 제법무아의 의미입니다.
사물이 그저 인연에 따라 만나고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어서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용산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3D 안경을 쓰고 3D영화를 보면 영화 속 악당이 내 눈앞으로 주먹을 날리는 것 같지만 손을 뻗어 막으려 하면 주먹이 만져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색즉시공을 더 자세히 설명한 구절이 ‘오온개공(五蘊皆空)’ 입니다. 오온은 다섯가지 무더기라는 의미로 개인 존재를 구성하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을 뜻합니다.
첫번째 집합은 색온(色蘊)입니다. 색의 기본적인 의미는 눈,귀,코,혀,몸 다섯 신체기관과 이 신체기관이 느끼는 색,소리,냄새,맛,촉감을 가르킵니다.
내가 눈으로 보는 세상은 진실일까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는 빛의 파장이 약 380nm에서 780nm 대의 파장인 가시광선 영역뿐입니다. 인간은 전체 태양광의 절반에 가까운 에너지를 가졌기 때문에 빛이 세고 반사가 강한 가시광선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시광선외에 인간이 볼 수 없는 빛이 이 세상에 더 많이 존재 합니다. 라디오파,마이크로파,적외선,가시광선,자외선,X선,감마선 등 빛의 파장과 진동수에 따라 분류되어 세상에 빛을 비춥니다.
벌은 꿀을 가지고 있는 꽃을 찾기 위해 자외선을 볼 수 있고 개와 고양이, 흰담비, 고슴도치 같은 동물들도 자외선이 수정체를 지나 망막에 도달해 이를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는 붉은 배롱 꽃이 우리집 반려견 짱아 눈에는 노란색 개나리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개는 빨강과 파랑은 구별하지만 빨강과 노랑은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개가 보는 자외선 세상과 뱀이 보는 적외선 세상과 개구리가 보는 회색 빛 세상 중 어느 것이 진실일까요?
우리 눈에 보이는 무지개도 진실한 존재가 아니고 개구리가 보는 파리도 진실한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내 두 눈은 점점 더 노쇠해 가며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세포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자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고 전자와 전자의 거리는 우리의 우주와 다른 우주 사이의 거리와 같습니다.
눈 앞에 형형색색의 사탕에 헐떡이지 말아야 합니다.
존재는 눈에 보이는 사물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에 더 많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탕이 존재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사탕은 극히 일부분이고, 보이지 않는 사탕은 무한합니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 눈에 보이는 것은 환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진실한 세계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색은 공입니다.
두번째 집합은 수온(受蘊)입니다. 수(受)는 색인 몸이 외부로 부터 받아들이는 감각을 의미합니다. 드라마속 전지연을 보고 있으면 눈이 즐겁습니다. 개똥을 치울 때는 개똥 냄새로 코가 괴롭습니다. 맹물을 마실 때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습니다. 수온은 즐거운 것,괴로운 것,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통이나 즐거움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나'의 느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 느낌이라는 것도 고정되지 않고 시시각각 변합니다. 우리의 몸과 외부 세계의 상태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연 조합이 변하면 느낌도 변합니다.
그러므로 수는 공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번째 집합은 상온(想蘊)입니다. 상(想)은 대상(對象)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각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동일한 대상이라도 개인에 따라 또는 국가에 따라 대상에 대해 형성되는 개념이 다릅니다. 전지현을 보고 미인이라고 하지만 이 미인의 개념도 국가나 개인에 따라 이해하는 바가 천차만별입니다. 그 어떤 개념도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개념은 단지 기호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상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상입니다.
네번째 집합은 행온(行蘊)입니다. 행(行)은 실제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의 의지 작용을 의미합니다.행온의 작용으로 카르마라고 하는 업력이 생겨납니다. 업력을 일으키는 행온이 발생하면 행온에 대한 집착을 버려 인과의 윤회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은 사실 실재하는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억겁을 거쳐 쌓인 업력이 모여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행은 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다섯번째 집합은 식온(識蘊)입니다. 식(識)은 모든 현상을 의식하고 분별하는 마음의 총체를 가리킵니다.식은 아는 마음으로 분별,식별,인식을 주도하기 때문에 심왕(心王) 이라고도 합니다. 문제는 대상을 자기 식대로 인식하여 분별하는데 있습니다. 고정되고 실체적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크다, 작다,아름답다,추하다고 자기식으로 분별합니다. 지금 탁자위에 놓여 있는 사과는 배에 비해서는 작지만 귤에 비해서는 큽니다. 그럼 이 사과는 큼니까 작습니까? 고정된 실체라고 할것이 없는 대상을 분별 짓는 식온에서 벗어 날 때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식은 공이고 공은 곧 식입니다. 인연이 생겨나면 의식도 생겨납니다.
한자로 나 아(我)는 손(手)에 창(戈)을 들고 자신을 방어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를 내세울 때 세상은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세상의 모든 싸움은 모두 우리가 ‘나’에 집착하여 헤어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나란 존재는 불변인 것처럼요. 교수 일을 오래하면 퇴직하고도 자신을 교수로 여기고 몇십년 주부로만 있으면 자신을 주부로 동일시합니다.
불변의 자아는 없습니다.
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말이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시시각각 바뀌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공간에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존재자로서 살아가야겠습니다.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을 끝으로 글을 마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반야심경
제다이에게 ‘포스’가 함께 하듯이 당신에게 ‘지혜’가 함께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