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I라는 카본화를 신었다고 당신의 기록이 되는 것은 아니다
2025. 11. 28
내가 다니는 회사, 참 좋다.
창립 20주년을 맞아 전 직원에게 일본 2박 3일 해외여행을 선물했다.
나에겐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해외에서 달리기’를 실현할 절호의 기회였다.
숙소는 구마모토현 아소산 자락의 골프장.
첫날밤 회사에서 준비한 고급 사케를 진탕 마시고,
다음날 아침 Run mode 동호회분들과 해외에서 달리기 미션을 수행했다.
대구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의 김OO 프로,
생후 한 달 된 딸을 두고도 흔쾌히 육아를 맡아준 천사 같은 아내를 둔 손OO 프로,
그리고 조금 늦게 합류한 김OO 프로까지.
해가 떠오르는 아소산 골프장을 함께 달렸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도 아쉬움이 남아, 혼자 골프 코스를 더 뛰었다.
터널을 지나고, 노루를 마주치고, 풍경은 말 그대로 예술이었다.
둘째 날 Deep sleep mode로 숙면을 취한 후
마지막 날 홀로 Run mode로 전환해서 나머지 골프 코스를 돌았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이 부럽지 않은 태양의 온기와 청정 공기가 온몸의 세포를 깨웠다.
사실 위에서 말한 'Run mode'와 'Deep sleep mode'는 반도체 설계에서 쓰이는 용어들이다. 칩이 최대 퍼포먼스를 내기 위해 모든 회로를 깨워 전력을 쏟아붓는 상태가 'Run mode'라면, 반대로 전력 소모를 극단적으로 줄여 에너지를 보존하는 최저 전력 상태가 'Deep sleep mode'다.
우리 인생도 정교한 반도체와 같다. 아소산의 주로 위에서 나는 내 몸의 모든 회로를 깨우는 'Run mode'를 가동했고, 밤이 되면 내일을 위해 가장 깊은 곳의 스위치까지 내리는 'Deep sleep mode'로 에너지를 비축했다. 이 철저한 **전력 관리(Power Management)**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이라는 긴 레이스를 완주할 수 있다.
회사에서 일본 여행 포토 이벤트를 한다고 해서 응모했다.
차별점을 두기 위해 머스크가 만든 그록(Grok)에게 여러 번 프롬프트를 던졌다.
"이 사진 남자가 달리다가 슈퍼맨처럼 날아서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는 동영상 만들어 줘. 떨어지지 말고 하늘로 사라지게 해"
그 결과, ‘날아오르는 러너’ 영상이 탄생했고 덕분에 일본 여행 포토 이벤트 우수작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것을 ‘내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문가의 영역이던 기술들이 이제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공재가 되었다.
바야흐로 ‘누구나 크리에이터’의 시대다.
하지만 냉정하게 물어보자.
도구가 강력해졌다고, 결과물까지 자동으로 위대해지는 걸까?
나는 지금의 이 현상을 풀코스 마라톤에 비유하고 싶다.
마라톤 42.195km.
과거 이 거리는 체계적인 훈련을 쌓은 러너들만이 완주를 꿈꿀 수 있는 '철인'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기술은 코스의 길이를 줄이지 못해도 달리는 방식은 바꿔놓았다. 고반발 카본화와 정밀한 GPS 워치, AI 코칭 덕분에 이제 초보자도 꽤 준수한 페이스로 중반부까지 밀고 나가는 '장비의 축복'을 누린다.
지금의 AI 열풍이 딱 그렇다. 기술은 우리 업무의 페이스를 단숨에 '서브 4'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이제 갓 입사한 신입사원도 AI라는 카본화를 신으면, 베테랑이 며칠 걸려 고민하던 보고서의 초안을 순식간에 뽑아낸다. 이것은 분명한 축복이다. 소위 ‘평균 이상의 기록’을 내기 위한 진입 장벽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뜻이니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카본화의 반발력에 의지해 20km 지점을 통과한 이들이 자신의 심폐지구력이 완성되었다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AI가 내놓은 매끈한 80점짜리 결과물을 자신의 실력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기술이 만들어준 유려한 문장과 화려한 차트는 엄밀히 말해 당신의 근육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기술이 선사한, 아주 가벼워진 신발 덕분일 뿐이다.
신발이 좋아졌다고 해서 42.195km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초반의 가벼운 페이스에 취해, 결승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샴페인을 터뜨리려 한다.
러너들은 풀코스의 35km 지점부터를 '진짜 마라톤'이라 부른다. 글리코겐은 바닥나고, 오직 인간의 초인적인 의지와 단련된 근육, 본능적인 판단력으로만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하는 구간이다.
비즈니스 글쓰기와 기획의 세계에도 이 '마의 구간'이 존재한다.
AI는 30km 지점까지 우리를 아주 편안하게 데려다준다. 자료를 요약하고, 목차를 잡고, 초안을 다듬는 것까지는 기계가 더 잘 뛴다. 그러나 그 너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의사결정권자를 설득하며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피니시 라인'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남들이 기계의 힘으로 80점의 페이스를 유지할 때, 99점의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맥락(Context)’이라는 주로를 읽는 눈이다.
AI는 확률적으로 정답에 가까운 보폭을 제안할 뿐이다. 비즈니스는 데이터 너머에 있다.
미묘한 사내 정치학, 숨겨진 이해관계,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의 공기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제안서가 논리적인가?"는 AI가 판단할 수 있지만, "지금 이 승부수를 던져야 하는 타이밍인가?"를 결정하는 건 오직 인간의 심장만이 할 수 있다.
상향 평준화는 필연적으로 획일화를 부른다. 너도나도 똑같은 카본화를 신고 똑같은 프롬프트를 입력한다면, 그 결과물은 소름 끼치도록 비슷해진다.
이 매끈하고 흠잡을 데 없는 ‘AI 페이스’의 홍수 속에서 눈에 띄는 건, 오히려 조금 거칠더라도 러너의 숨소리가 느껴지는 글이다.
자신만의 관점, 소위 ‘인사이트’라 불리는 것은 기계적인 데이터 요약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주로 위에서 겪은 치열한 고민과 실패의 파편들이 부딪쳐 만들어내는 불꽃이다. 기계가 매끄러운 보폭을 만들 때, 프로는 뾰족한 관점을 만든다. 그 뾰족함이 있어야 독자의 뇌리에 박히고,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완주의 책임’*이다. 레이스 도중 끝까지 달릴지, 여기서 멈출지를 결정하는 건 카본화가 아니라 러너 자신이다. 비즈니스 문서의 마침표를 찍는다는 건 단순히 작문을 끝내는 게 아니라 그 기록에 내 이름을 걸겠다는 선언이다. AI는 보조할 뿐 책임지지 않는다. 그 고독한 레이스의 무게를 견디는 것, 그것이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다.
결국 도구의 발전은 우리에게 더 강한 체력을 요구하고 있다. 남들이 기계의 힘을 빌려 쉽게 도달한 30km 지점에서 "이 정도면 훌륭해"라고 자위할 때, 진짜 고수들은 신발 끈을 다시 조여 맨다. 그리고 기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독한 마지막 7km를 다시 시작한다.
우리의 목표는 초반 페이스의 인증샷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온전한 내 심장과 근육으로 통과하는 피니시 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