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중고 재봉틀 하나 구할 수 있을까요? 이왕이면 선생님들이 쓰시던 걸로요. 길이 잘 들어있는,,,"
2010년 7년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결혼 날짜를 받아 놓고 찾아간 곳은 예전에 함께 일하던 봉제사 김 선생님 작업실이었다. 업계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김 선생님은 내가 의류 회사 막내 디자이너로 취직했을 때 가장 먼저 만난 샘플 봉제실의 미싱 달인이시다. 여성복, 남성복은 물론 웨딩드레스까지 완벽하게 섭렵하고 계셨던 분이시기에 김 선생님이라면 내가 결혼해서 평생 함께할 친구를 소개해 주실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다시 한국에 들어올 생각이 없었던 나는 의상학과 학생 시절 내내 사용했던 나의 재봉틀 80년대생 썬스타 중고 미싱을 미련 없이 동네 중고 물품상에 내다 팔았다. 그때만 해도 내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 결혼하고 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캐나다에 머무는 동안 월마트에서 산 브라더 가정용 미싱을 한대 구입해 사용했다.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나는 다른 기계는 잘 다루지 못해도 재봉틀 하나는 잘 다룰 수 있었다. 가정용 재봉틀은 노루발 힘이 약해서 데님 청바지처럼 두꺼운 원단을 박기 쉽지 않다. 조금만 두꺼운 원단을 박아 넘기려다 보면 실이 끊어지기 십상이고 운이 안 좋은 날엔 모터까지 고장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난 웬만해서는 재봉틀 고장을 내지 않고 만약 고장이 난다 해도 살살 달래어 잘 고쳐 쓰고는 했다. 나의 바느질 실력은 밴쿠버에서 금세 소문이 났다. 당시 나는 노스 밴쿠버 편집 스토어에서 매니저로 근무 중이었는데 함께 일하는 어린 직원들의 바지나 재킷 등을 재미 삼아 수선해 주곤 했다. 캐나다에서 수선비는 우리나라의 3배 정도로 비싸다. 그러니 서양 아이들은 나의 서비스가 감지덕지할뿐더러 새 옷처럼 예쁘게 만들어 주니 직원들 사이에서 나는 거의 톱 디자이너였다. 그뿐만 아니라 매장에서 필요한 파우치나 더스트 백, 샘플 의상들도 짬짬이 작업해 보여주니 나의 위상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하루는 사장님께서 오시더니 손님이 구매한 옷의 길이나 품등 간단한 수선 서비스를 개설하고 그 수익의 전부를 모두 나에게 주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수선 서비스를 시작하면 우리 매장의 서비스 인지도가 올라가니 사장님은 고정 고객이 늘어나 좋고 나는 서브 수입이 생기게 되니 이것이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닌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국에서 온 디자이너 출신의 동양인이 바지 길이와 품등 수선을 잘해준다는 매력적인 마케팅은 밴쿠버에서 패션 맛집이 되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나의 쏠쏠한 수입에 주머니가 빡빡했던 해외 생활이 조금이나마 여유롭고 활기찰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여유로운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비자 문제로 갑작스럽게 캐나다를 떠나야 했던 날, 한국을 떠났을 때처럼 나의 친구이자 용돈벌이가 되어 주었던 브라더 미싱을 유학생들이 모여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헐값으로 팔아버렸다.
급작스럽게 결혼 날짜를 받아 놓고 나니 공간 이동을 한 것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었지만 '결혼'이라는 단어에는 확신이 없었다. 혼전 임신이라는 사실도 믿을 수 없었지만, 다시 한국에 정착해야 한다는 사실은 더욱 믿기지 않았다. 결혼 후 신랑을 따라 춘천에서 신접살림을 차려야 했기에 캐나다에서 중국, 중국에서 서울, 다시 서울에서 춘천으로의 이동은 나에게 큰 모험이었다. 당장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한국에서 다시 디자이너로 취직한다는 건 불가능하겠지? 30대 중반을 향해가고 있는 임신한 나는 노산을 넘어 '경력 단절' 여성이기도 했다. 귀국 후 의류 회사에 취직한다고 해도 날 고용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30대 중반이면 실장급 자리인데 그 월급을 주면서 날 고용할 만한 회사를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보통 패션 디자이너 10년 차쯤 되면 한 직장에 몸담아 차곡차곡 자신의 직급을 높이거나 자신의 브랜드를 개업하는 절차를 밟는 게 그 당시 일반적인 수순이었다. 하지만 난 해외 생활의 공백이 있었고 우리 집은 귀국한 딸에게 부티크를 오픈해 줄만 한 부자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 결혼에 임신까지 한 그야말로 난 애 딸린 '유부녀'였던 것이다.
7년 만에 찾아간 샘플 제작실 김 선생님은 나를 15년 전 새끼 디자이너 때 그대로 날 반겨 주셨고 좋은 중고 재봉틀도 찾아보시겠다고 하셨다. 일주일쯤 뒤 연락이 왔다. 5~6년 된 썬 스타 재봉틀인데 솜씨 좋으신 선생님께서 사용하시던 재봉틀을 찾았는데 60만 원에 가능하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200만 원짜리 재봉틀을, 그것도 전문가의 손때가 묻어 길이 잘 들어 있는 재봉틀을 삼분의 일 가격에 물려주신다니 너무 감사했다. 공간 이동을 해 외롭고 힘들었던 나에게 다시 멋진 친구가 생기는구나. 앞으로 육아하면서 사부작사부작 나만의 작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결혼과 출산에 대한 막연함과 두려움도 조금은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새로 태어날 '바다'의 배냇저고리도 만들고 아기 이불도 손수 만들어야지~, 새집에 꾸밀 쿠션과 커튼도 작업해야지~. 내 배는 점점 불러오고 있지만 나의 친구 재봉틀 덕분에 나의 몸은 더 활발하게 움직이고 하루는 짧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