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열여섯 달을 채웠을 무렵, 처음으로 형아를 따라 어린이집에 발을 디뎠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렇겠지만 첫째를 키울 때와 둘째랑은 완전히 다르다. 이미 한 번 지나온 길이라 익숙할 법도 했지만, 둘째는 첫째와는 전혀 다른 파도를 품고 있었다. 첫째는 잔잔한 호수 같이 조용하고 순했고, 그 덕분에 나의 육아 초행길은 비교적 평탄하게 지나갔다.
그래서 둘째도 그럴 거라 은근히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둘째는 달랐다.
겁도 없고 모험을 즐겼으며 움직임도 빨랐다. 간간이 나의 취미 생활을 하기는커녕 아이 뒤치다꺼리에 금방 지쳐갔다.
‘육아는 경험이 쌓이면 쉬워진다’라는 말은 절반쯤만 맞았다. 세상에 쉬운 건 하나도 없다.
그 무렵, 지친 나에게 친정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애는 누워있을 때가 제일 편한 거야. 기고 걸어봐~ 그땐 더 힘들고 정신없다."그렇다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고 있는 아이를 눕혀 놓을 수만은 없지.
그 당시 나는 직장을 잠시 내려놓은 전업주부였고, 정부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부모에게 매달 10만 원을 지원해 줬다. 나를 위한 육아의 수고비라고 하면 턱 없이 부족한 액수지만 아이 간식비로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위로의 용돈이었다. 하지만 어린이집에 등록하는 동시에 그 지원은 사라진다. 대신 난 자유로워지고 아이는 사회를 배우기 시작한다.
둘째도 형아를 따라 처음으로 집 밖에서,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 둘을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나에게도 제법 넉넉한 시간의 자유가 찾아왔다. 처음엔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당황스럽기도 했다. 4년 넘게 '엄마'라는 직함 아래 모든 감각이 아이에게 맞춰진 삶을 살다 보니, 나 자신은 희미해져 있었고 경력 단절이라는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내 이름 옆에 조용히 따라붙어 있었다. 나의 패션도 가관이었다. 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짐이 분명했다. 한때는 압구정 거리를 씩씩하게 걷던 의상 디자이너였던 내가, 지금은 유아복 세일 정보에 촉을 곤두세우는, 오직 아이 용품에만 반응하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임신 전 입던 옷들은 어느새 나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있었다. 내 몸이 문제인지 그 옷들이 작아진 건지 더 이상 내 몸에 들어오지 않았고, 내 생활 패턴과도 맞지 않았다.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 들어가 보는 온라인 쇼핑몰에는 예쁜 원피스 대신 수유복과 유아복, 유아 식기등이 즐겨찾기에 남아 있었다.
나는 두 아이를 각각 12개월씩, 모유 수유로 정성껏 길렀다. 그러다 보니 출산 후 다이어트는 늘 ‘언젠가 해야 할 일’로 미뤄졌고, 모든 초점은 오로지 가족과 아이들에게만 맞춰져 있었다.
한적한 강릉, 그것도 북쪽 끝에 있는 사천에 주택살이를 시작하면서 난 정말 시골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면 헐렁한 무릎 나온 바지에 남편이 더 이상 입지 않는 큼직한 티셔츠를 입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정원으로 나가 잡초를 뽑았다. 텃밭 가꾸는 건 꽤나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지만 잔디 잡초 뽑는 건 정말이지 막노동이다. 그건 ‘자연과의 교감’이 아니라 ‘풀과의 전쟁’에 가까웠다. 안 그래도 거뭇 잡잡한 피부는 금세 까맣게 되고 얼굴에 기미와 주근깨가 올라왔다.
하루는 남편 회사의 후배 와이프에게서 연락이 왔다. 강릉으로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돼 이주한 가족이었는데 강릉 정착도 도와줄 겸 정보 공유도 하고 아이들도 나이가 같아 친하게 지내자며 몇 번 가족모임도 하고 티 타임도 했던 분이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카페로 갔다. 남편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강릉살이의 크고 작은 일들을 나누고 있었는데 짧은 반바지에 여성스러운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가 산뜻하니 예뻐 보였다.
"나도 민이 맘처럼 살도 빼고 관리 좀 해야 하는데,,, 관리를 참 잘하시는 거 같아요!"
그러던 중,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지환이 엄마도 좀 신경 쓰세요. 피부 관리도 좀 받고, 예쁜 옷도 입고요. 맨날 남편이랑 애들만 챙기다 보면
진짜 나중에 후회해요.”
그 말은 백 번 맞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속이 뒤집혔다.
부끄럽고 창피했다.
내가 외면하고 있던 나를 그녀가 너무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돈을 벌지 않아도 남편 월급으로 눈치 보지 않고 마사지도 받고 옷도 사다던데.. 순간 그렇게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갑자기 우울해지네.. 나도 이제 나를 위해 살아야겠어요."
"우리 좋은 데 갈래요?"
그녀는 나의 우울한 표정을 보고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좋은 곳?"
어린애들을 어린이집 보내 놓고 강릉에서 아줌마들이 갈 수 있는 '좋은 곳'이라면 어디일까?
멀지 않다고 좋은 구경 하자며 이끄는 대로 그녀를 따라 카페를 나왔다.
[Joue La Vie] 주라비,
그녀가 날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프렌치 용품 편집숍이었다.
당시 강릉엔 백화점도 이렇다 할 쇼핑 공간도 제대로 없었다. 이마트와 홈플러스가 강릉에서 유일하게 소비를 할 수 있는 곳이었고 쇼핑을 하려면 온라인 숍을 이용하거나 서울로 나들이를 가야만 했다.
50평 남짓한 '주라비'는 그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은 없었지만, 아름다운 프렌치 가구들과 집을 꾸미기에 좋은 아름다운 소품들이 가득했다. 매장은 프랑스 제품인 '마틸드 엠'의 석고 방향제와 샤쉐의 향으로 가득했고 최고급 리넨으로 만들어진 이불과 쿠션, 테이블 커버는 고급스러운 향기들과 어우러져 마치 나를 유럽 어느 골목으로 데리고 온 기분이었다. 한참을 둘러보다, 마치 우연인 듯 운명처럼 매장 한쪽 벽에 걸린 가방 하나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그건 내가 10년 넘게 옷을 디자인하며 수많은 원단을 다뤘지만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질감이었다. 마치 시간을 오래 품은 천조각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가격표를 슬쩍 들춰본 순간, 나를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
43만 원.
가죽도 아닌, 무심한 듯 보이는 캔버스 가방이? 한참 보고 있으니 사장님께서 다가오셨다.
“프랑스 제품이에요. Le Grancerf라는 브랜드인데, 다들 예쁘다고 하시지만 가격 보고 놀라시긴 하죠.”
나는 무심한 척, 그러나 마음 한가득으로 미술 작품을 바라보듯 가방을 들여다보았다.
만약 저 원단만 구할 수 있다면, 금방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천은 익숙한 듯 낯설었고, 무엇보다 가방에 달린 가죽 핸들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세월이 가죽 위에 녹아내린, 시간의 손길로 매만져져 자연스럽게 태닝 된 그 핸들은, 오랜 이야기들이 축적된 특별한 물건처럼 보였다.
잠시 뒤, 사장님은 조심스럽게 빈티지 가죽 스트랩 한 세트를 가지고 나오셨다. 길이 잘 들고 결이 살아 있는 가죽, 그 안엔 누군가의 손때와 시간이 배어 있었다.
이건 단순한 가방이 아니라, 한 조각의 시간과 그 이상의 삶이 담겨 있는 작품이었다.
서울에서 의상 디자인을 하고 지금도 취미로 가끔 재봉을 한다는 말에 사장님은 원단만 구한다면 핸들은 제공해 줄 테니 가방을 만들어 보겠냐고 제안을 하셨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에게 새로운 숙제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 숙제는 어쩜 나를 깨우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곧장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시간을 헤맨 끝에 마침내 그 원단의 정체를 알아냈다.
100년이 넘은 유럽의 곡물자루로 만들어진 햄프, grainsack.
그것은 단순한 천이 아니라, 유럽의 들판과 노동, 그리고 시간을 품은 특별한 원단이었다. 나는 밤을 새워 국내외 사이트를 뒤지고, 헌팅하듯 원단을 찾아나갔다. ‘쇼핑’이 아닌 ‘탐험’에 가까웠다.
며칠이 지나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지만 블로그를 통해 햄프 한 롤을 구할 수 있었고 다시 '주라비'를 찾았다.
사장님께서는 약속대로 빈티지 핸들을 내어주시면서 멋진 작품을 기대하겠다고 하셨다. 혹시라도 재단을 잘못하거나 실수를 하게 되어도 같은 원단을 다시 구할 수 없는 엔틱 햄프라 더욱 조심스레 작업을 해야 했다.
옷에 비해 작업 절차는 매우 간단하지만 소재 특성상 매우 신중함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2015. 6.19
큰 아들의 생일이기도 한 이 날은 처음으로 내 손으로 완성한 햄프 가방이 세상에 나온 날이다.
그렇게 또 하나의 '탄생'을 경험했다.
완벽하게 숙제를 끝낸 모범생처럼, 나는 정성스레 마무리한 가방을 사진에 담아 카카오 스토리에 올린 뒤, 숙제를 내준 선생님께 검사를 맡으로 가는 학생처럼 다시 '주라비'로 향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만든 작은 세계를 자랑하고 싶은 어린아이 같았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니, 거의 폭발적이었다.
사장님은 가방을 보자마자 바로 구매하겠다고 하셨고, 나는 그분이 제공해 주신 핸들 값을 제외하고 가방을 판매했다. 작은 거래였지만, 그것은 내게 첫 수확이자 계약서 없는 브랜드 론칭 같았다.
이후 SNS 채널에서도 반향은 이어졌다. 내가 만든 햄프 가방에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몰려들었다.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소재는 무엇인지, 주문은 가능한지… 질문들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반응 속에서 몸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에너지가 솟았고, 나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재료였다. 더 만들고 싶어도 국내에서는 오리지널 햄프를 좀처럼 구할 수 없었고, 나는 곧장 해외 사이트로 눈을 돌렸다. eBay나 Amazon 같은 플랫폼에서도 간혹 보이긴 했지만, 가격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정확한 컨디션을 알 수 없는 사진 몇 장으론 선뜻 주문하기 어려웠다. 그 무렵, 우연히 들른 블로그를 통해 영국에서 햄프 원단과 앤티크 아이템을 판매하는 셀러를 알게 되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포기하지 않고 찾으니 길이 열렸다.
잊고 지냈던 설렘이 다시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지금이야.’
그날 밤, 퇴근한 남편에게 나는 조심스럽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여보, 나 200만 원만 빌려줘. 석 달 안에 갚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분명히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도 다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바람과 동시에 가능성을 묻는 인터뷰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