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프가 뭐예요?
두꺼운 캔버스 같기도 했지만 일반 면이나 리넨과는 확실한 차이를 보이는 원단. 깨끗한 새 원단은 아니지만 그래서 뭔가 더 정감이 가고 특별함이 있는 다른 무엇.
그것이 햄프라는 걸 안지 딱 10년이 되었다.
나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햄프를 왜 햄프라고 불렀는지 궁금했다. 햄프(Hemp)를 인터넷 사전에 찾아보면 원단이 아닌 '햄프씨드'가 먼저 검색되기 때문이다.
삼 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인 삼(헴프, Hemp)의 성숙한 과실. 햄프씨드는 ‘대마초의 씨앗’
**다만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제2조 제4호에서 대마초의 종자는 대마에서 제외한다고 분명하게 하였으므로 먹거나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없다.
햄프는 '마약용 대마(THC)'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로, 산업용 대마(Industrial Hemp)에서 얻은 줄기 섬유로 옷이나 가방, 천으로 쓰이고 안전하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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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무시한 대마초,,, 그래서인지 영문사이트에 햄프 (Hemp)를 찾아봐도 내가 찾는 햄프(grainsack)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햄프’라고 부르는 걸까?
내가 사용하는, 즉 우리가 좋아하는 햄프 가방의 소재‘햄프 리넨’의 정확한 명칭은 곡물자루= grainsack이다. 처음 강릉의 편집샵인 주라비에서 햄프가방을 발견하고 원단을 찾아 인터넷을 뒤졌을 때 검색창에 사장님한테 들었던 이름 hemp, Hemp fabric을 쳐도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내가 찾은 햄프는 Grainsack, Linen bag, Farmers sack 등으로 검색해야만 찾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햄프가방의 마니아 층이 꽤 두껍게 형성되어 있고 온라인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10년 전에 좋은 햄프를 찾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럼, '햄프리넨'에서 리넨은 정확히 무엇일까?
유럽에서는 flax라고 부르는 유럽산 아마의 줄기 껍질을 섬유로 짜서 리넨이라는 천을 만든다. 인류 최초의 직물 재료 중의 하나로 고대로부터 널리 이용되어 왔고 더 오래전부터 이집트 뿐 아니라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섬유 식물로 재배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유럽권에서는 리넨이 필수적인 기본 옷감이었다. 통풍이 뛰어나 평상복뿐만 아니라 속옷으로도 제작하고, 수의도 리넨으로 만들었는데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리넨 갑옷도 있었다고 한다. 1578년부터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에 보관 중인 예수님이 입으셨다는 유명한 토리노 수의도 예수의 시신을 감쌌다고 전해지는 리넨 천이다.
현재 우리에게 친숙한 면직물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대중에 널리 보급되었고 플란넬(모직물)은 맨살에 닿으면 촉감이 안 좋아서 인기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에 반해 리넨은 모직물에 비해 가격이 저렴했기에 오랜 시간 동안 유럽 의류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양을 키우기보다는 아마 재배가 훨씬 경제적이기도 하고, 기계화되기 전까지 양모는 세척하여 양털을 꼬아 실을 만들기까지 품이 매우 많이 들었다. 또한 도시에서 주로 생산하던 모직물 의류는 길드의 독점과 과도한 규제 탓에 비효율적이었던 반면에, 리넨은 주로 시골에서 생산하였기에 길드의 비효율성에서 자유로웠던 점도 컸다. 덕분에 면직물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유럽인들의 사랑을 받은 가장 저렴하고 실용적인 원단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여름을 견딜 수 있는 아주 고급 직물이 있었는데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마'는아마를 뜻하고 '라미=Ramie'는 모시(저마)를 뜻한다. 마 직물류 중 아마가 가장 가격이 비싼 편인 직물이고, 그다음으로 모시(저마), 삼베(대마), 주트(황마) 순으로 가격이 형성된다.
대마라고 부르는 식물에서 얻는 천연 섬유에 속하는 햄프는 한국의 삼베나 모시와 가장 가장 흡사하다.
Grainsack은 원래 곡물 자루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곡물(보통 밀, 옥수수, 보리 등)을 담기 위해 사용되던 커다란 자루를 말하는데,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럽, 특히 독일, 프랑스등 서유럽뿐 아니라 헝가리, 오스트리아등의 동유럽 농가에서 널리 쓰였다. 요즘은 산업화되고 대형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100년 전에 사용되던 곡물 자루들은 더욱 희소성을 가지게 되었다.
곡식을 담는 자루인 만큼 통풍이 잘되고 튼튼하며 친환경적이어야 한다. 거칠면이 있지만 튼튼하고 통풍이 잘되는 대마원단은 곡물자루로 사용하게에 완벽한 원단이었다. 곡물자루마다 블루, 레드, 그린 등 다양한 컬러의 줄무늬 실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농장 구분을 위한 '마킹' 용도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세로 줄무늬가 박힌 경우가 많고, 농장 이름이나 로고가 인쇄되거나 십자수로 새겨 넣기도 했다. 백여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색은 바라기도 하고 옅어지기도 했는데 이 컬러가 진짜 아름답다. 결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색상이다.
햄프는 항균성과 통기성이 뛰어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진다. 쉽게 썩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속도 또한 빠르다.
나는 그런 점이 좋았다. 쓰고 버리는 물건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닳고, 헤지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 오랜 세월을 거쳐 나에 손에 들어온 자루들은 세탁과 수축이 이미 여러 차례 진행돼 가공성이 좋고, 내구성도 뛰어나다. 그래서 왕드레킴이 사용하는 엔틱 자루들은 단시간 내에는 얻을 수 없는 퀄리티를 느낄 수 있다.
오랜 세월을 거쳐 100년이 지난 미래로 온 곡물자루들은 현지 셀러들을 통해 왕드레킴의 선택을 받아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온다. 곡물자루를 다시 해체해서 원단으로 만들고 세탁을 한다. 다시 뽀송뽀송하게 태어난 햄프는 왕드레킴의 가방뿐 아니라 쿠션, 바란스, 소품등 다양한 용도로 만들어진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버려지거나 썩는 게 아니고 다시 태어나 새로운 쓰임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햄프라는 재료는 나에게 단순한 패브릭이 아니다. 내가 자연과 맺는 관계의 일부분이고, 자연스러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태도이다.
왕드레킴은 트렌드에 빠르게 반응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담기 위해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