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마스크 때문에 더워 죽겠는데, 그 사이로 눈물 콧물이 주르륵 흐른다.
코로나 2년 차, 둘째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해는 코로나 종식은커녕, 평생 마스크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모두가 예민하고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다니는 사천의 작은 초등학교는 다행히 온라인 수업은 면한 상태였다. 학생 수가 많지 않아 오프라인 수업이 가능했고 매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2학년 꼬꼬마는 하교하면 한숨부터 쉰다. 오늘도 그 녀석에게 당했나 보다.
"오늘은 또 왜??"
닭똥 같은 눈물이 마스크를 뚫고 흐른다. 엄마를 보니 참았던 눈물도 다시 폭발하는 거다.
"그 녀석이 욕하고 때렸어"
"또?"
으~~ 앙~~~
선생님은 알고 계시냐고, 네가 맞을 때 뭐 하고 계셨냐고, 사과는 받았냐고 아이를 다그쳤다.
우는 아이에게 위로를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따지고 물었다.
아이는 더 세차게 울었다.
마스크 때문에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짜증이 밀려와 휴대폰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 려환이 엄마예요."
다짜고짜 려환이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아이가 등짝이 이렇게 시뻘겋게 된 걸 아시느냐고, 그 아이 부모님께 아이의 행동을 통보했냐고, 이런 상황을 보고 어떻게 하실 건지 물 대포 쏘듯 쏘아붙였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학교에 부임한 지 2년 차이신 새내기 선생님이셨다. 체구도 작고 여리여리해서 멀리서 보면 고등학생 같기도 한 젊은 MZ 세대였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고 울며 들어오는 아이를 보니, 사회 초년생의 설레는 학교생활도 남의 집 귀한 딸의 마음도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아이의 상처만이 눈앞에 가득했다.(지금 생각하면 참 무례한 일이었다.)
다짜고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냐고 쏘아붙이는 학부모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선생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어머님. 죄송해요. 제가 려환이 상처 안 받도록 잘 보살필게요."
상대방 아이 부모님께 꼭 말해야 한다고 그래야 집에서도 단도리를 할 것이 아니냐며 신신당부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에도 려환이는 울면서 집으로 오는 날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난 항상 상대 아이들을 탓했다. 즉각 변하지 않는 아이들도 이해가지 않았지만, 변화 없이 한결같은 학교에도 실망했다.
지환이의 2학년이 끝날 무렵, 한 친구가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왔다. 전 학교에서 친구들과 갈등이 생겨 우리 학교로 온 것이다. 이 아이는 나름의 상처를 안고 왔기에 하루빨리 적응하고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하고 싶었을 텐데, 한 학년 한 반이라는 작은 학교에서 가족처럼 단단히 일 년을 보낸 친구들 사이에 들어와 새로 관계를 맺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빨리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다가갔지만 다소 거칠고 스스럼없는 태도는 오히려 친구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2학년 교실은 서서히 여진이 일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했지만 다행히 큰 탈 없이 겨울을 보내고 해가 바뀌었다.
하지만, 우리 학교는 반이 바뀌지 않는다. 한 학년 한 반인 작은 학교이기 때문에 6학년까지 같은 멤버 그대로 한 배를 타고 쭈욱 함께 간다. 그래서 좋든 싫든 지지고 볶으며 함께 지내야 한다. 지환이는 대부분의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즐겁게 학교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지만 새로 맞이한 3학년의 봄은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전학 온 친구는 아이들과 부딪히는 횟수가 잦아지고 하루가 멀다고 아이들 사이에 욕설과 주먹다짐이 오고 가는 등 수위도 올라갔다.
평소에도 눈물이 많은 꼬마는 울고 하교하는 일이 많아졌다. 아침 등교시키며 아이와 나누는 인사는 "즐겁게 보내~", " 공부 열심히 해~"가 아닌 "오늘은 울지 말자~"였다.
오늘은 또 왜 울었냐고 다그치기도 하고 일주일 동안 울지 않고 오면 좋아하는 레고 블록을 사주겠다고 경품을 내 걸기도 했다. 하지만 레고 블록은커녕 마른 얼굴로 넘어가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하루는 그 친구가 학교에서 어떤 불만이 있었는지 2층에서 뛰어내릴 거라고 도망 다니며 소동을 피운 사건이 있었다. 초등학생이 진짜 뛰어내릴 정도의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겠지만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이 아이를 잡으러 뛰어다니고 학교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난 참을 수가 없었다. 더 기다릴 수도 없었다. 남편에게 내 아이를 전학시키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은 여러 환경을 마주하며 크는 거라고, 그럴수록 지환이가 단단해질 거라던 남편도 반이 바뀌지 않고 6학년까지 이 분위기로 계속 생활해야 할지도 모르는 아이가 걱정되었는지 좀 고민해 보자고 했다.
참을성 없는 나는 결국 교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교무 부장님께 상담을 요청했지만 상담이 아닌 거의 협박할 기세로.
당시 교무 부장님은 아주 마르고 여린 선생님이셨는데 과학을 담당하고 계셨다. 이미 에너자이저 아이들과 매일을 치열하게 살고 계시는 선생님들은 학부모의 면담이 달가울 리 없다. 게다가 이미 여러 부모의 항의를 감당하고 계신 듯, 지친 기색이었다.
"선생님. 이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어떻게 마음 놓고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겠어요. 그 아이가 전학 갈 마음이 없다면 지환이가 전학 갈게요. 전 아이를 이 학교에 계속 보낼 자신이 없어요." 하소연하며 내가 알고 들은 그간의 이야기들을 폭로하듯 뿜어냈다.
자기 아이도 아닌데 학부모에게 아이들 잘못 키운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이상한 학부모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셨다. 잠시 후 선생님은 눈시울을 붉히며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어머님. 죄송해요. 저는 그렇게 못해요. 다른 학교에서 상처받고 온 아이를 어떻게 다시 내쳐요…. 그 아이가 다른 학교로 간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아이는 다시 상처받고 또 다른 친구들은 힘든 시간을 보낼 거예요.
그런데 이 아이는 잘못한 게 없어요. 다른 친구들과 어른들한테 상처를 많이 안고 자라서 그래요. 시간이 좀 걸릴 뿐이에요. 우리가 함께 지켜주면 좋겠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모두 함께 노력하면 반드시 좋아질 거예요. 지환이는 걱정마세요. 잘 지내도록 더 많이 신경 쓰고 노력할게요."
그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하필 다른 학교가 아닌 우리 학교로 와서 많은 학생들이 힘든지, 왜 기다려 줘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내 손을 꼭 붙잡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선생님 앞에서 더 이상 모질게 떠나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마음부터 다잡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흔들리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번 담임선생님과 학부모들이 함께 모여서 한 달 동안 학교 생활에 대해 나누는 '밤모임'에서도 더 이상 쉬쉬하고 묻어두지 않고 수면 위로 올려 함께 고민하자고 목소리를 모았다. 그 친구의 부모님이 일 때문에 바빠서 참석이 어려운 날엔 최대한 날짜를 변경해서 함께 할 수 있는 날로 조정하기도 했다.
여러 부모님들이 노력하자는 마음을 느끼셨는지 그 아이 엄마는 미안해하시면서도 참석하시려고 노력했고 무뚜뚝하고 관심이 없으셨던 아빠도 점차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난 하교 후에 지환이 친구들을 집으로 자주 초대했다. 물론 그 친구도 함께.
가까이서 챙겨주고 이야기 나누며 욕이 나오면 그건 나쁜 말이니 상대방이 상처받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혼자 휴대폰 게임을 하려고 하면 보드게임을 하거나 축구를 하도록 유도하고 함께 놀기도 했다.
아이들은 금방 달라졌다. 숨바꼭질도 하고 작은 모니터가 아닌 큰 보드판을 펼쳐놓고 게임도 하고 마당에 나가 공을 가지고 신나게 놀았다. 눈물은 온대 간데없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 친구는 단지 조금 더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아이였을 뿐이었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맞벌이 부모님, 각자의 사정. 우리 모두가 조금만 마음을 내면 함께 어우러질 수 있었다.
학교 반 모임을 통해 끊임없이 소통하고 이해하고 사랑해 주며 '기다렸던 시간'은 우리에겐 '배움의 시간'이었고, 그들에겐 '성장의 시간'이었다.
4년이 지난 지금, 첫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다. 오히려 아이는 초등학교 때 배운 ‘관계’에 대한 경험과 선생님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중학교에서도 매우 만족스러운 관계를 형성하고 즐겁게 지내고 있다. 물론, 그 친구와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가끔 만나 각자 학교 생활도 나누고 컴퓨터 게임도 한다.
이 친구들 사이에 웃음은 있지만 이제 더 이상 눈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등짝 스매싱과 거친 말에도 쉽게 눈물 흘리던 둘째도 어느덧 든든하게 성장해, 매일 행복하게 6학년을 보내고 있다.
난 여전히 당시 담임 선생님이셨던 허미희 선생님께 부끄럽고 죄송하다.
그리고, 속상해하며 흔들렸던 나의 마음을 꼭 잡아주셨던 이경태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을 잊지 못한다.
아이들은 저마다 성장하는 속도가 다르다. 그런데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늘 고속주행만 해왔다.
지금도 아이들은 가끔 나에게 "엄마~ 진정하세요~"라며 위트 있는 브레이크를 걸어주고는 한다.
기다림과 천천히 걷기를 가르쳐준 학교와 선생님들, 그리고 함께 걸어준 부모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