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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의 계절

by 왕드레킴

이른 아침 트랙터 소리에 웅성웅성 밖이 들썩인다. 아직 이삼십 분쯤 더 누워있어도 될 것 같은데, 내 단잠을 흔드는 걸 보니 오늘은 감자를 캐는 날인가 보다. 우리 집 정원 옆에는 작은 돌계단이 있다. 다섯 칸쯤 되는 그 계단을 오르면 양지바른 텃밭이 펼쳐진다.

300평쯤 되는 그 땅은 오래전부터 ‘갖고 싶은 땅’으로 마음속에 저장해 둔 공간이지만, 이미 그곳엔 오래도록 제철을 살아온 주인이 계신다. 일 년에 삼모작이나 하시는 바로 동네의 터줏대감 같은 할머니다. 그 땅의 주인이신 할머니께서 자식들이 어렸던 옛날에는 직접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옮겨 심어 농사를 지으셨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자녀들이 성장해 강릉(시내)으로 출가하고 할머니 건강도 나빠지신 후로는 손수 밭에 나서시진 않는다고 하셨다. 다행히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마을 이장님의 트랙터가 밭을 갈고, 러시아나 키르기스스탄 등 해외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인력센터를 통해 모종을 심고 수확까지 맡는다.

큰 포댓자루에 감자를 실은 트럭이 떠나고 나면, 한바탕 시끄럽게 웅성거리던 마을은 다시 고요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밭에는 포대에 실려 가지 못한 상처 입은 감자들이 뒹군다. 그 작은 알감자들이 아까워, 학교 갔다 온 아이들과 함께 큰 양재기를 들고 밭으로 향한다. 땅의 숨결이 아직 따뜻한 햇감자들을 주우며 아이들은 마치 보물을 캐듯 뛰어다닌다. 그야말로 바로 수확한 무료 햇감자다.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이 주워 담고는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생색을 내기도 했다.


널브러진 감자가 마르기도 전에 텃밭은 다시 트랙터의 도움으로 갈아엎어진다. 예전엔 이 일들을 다 사람의 손으로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밭은 금세 예쁘게 줄 맞춰진 이랑이 생기고, 새 식구를 맞을 준비를 한다.

이번엔 들깻잎이다. 작은 들깻잎 모종들이 줄지어 자리를 잡는다. 작은 모종들이지만 벌써부터 진한 들깨 향이 난다. 챙 넓은 모자에 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자연 속에서 흙을 만지는 이들의 표정에는 이상하리만치 선한 기운이 묻어난다. 한 두어 달이 지나면 깻잎은 어느새 무릎을 넘고, 허벅지 높이까지 자라난다. 우리는 삼겹살 위에 깻잎 한 장 올려 먹는 게 전부지만, 이 밭의 깻잎은 들기름이 되기 위해 자란다. 꽃이 피고, 들깨가 영글면 수확한 줄기를 잘 말려 까맣고 고소한 들깨 알을 털어낸다. 그 알맹이들이 모여 짜이면, 한 병의 고운 들기름이 된다. 지글지글 두부도 부치고 매콤하니 고소한 김치볶음밥도 할 생각을 하니 군침이 돈다. 바로 계절을 먹는 일이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신기한지 모른다.

서울에서 딸네 놀러 오신 친정엄마는 서둘러 들기름 두 병을 예약하신다.

“요즘 이런 들기름 서울에선 못 구해” 하시며 할머니 댁까지 내려가 손수 예약을 넣으신다. 농사짓는 집에서 자란 엄마는, 이 들기름 한 병 안에 깃든 고생을 누구보다 잘 아신다. 그래서 이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귀한 과정인지를 입이 마르도록 설명하시기도 한다.


그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어느새 가을의 바람이 논을 쓸고 나면 밭은 또다시 새 작물로 채워진다.

이번엔 ‘무’다. 무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우리 동네 길목이 참 예뻐진다. 감자꽃이 여름의 시작을 알렸다면, 무꽃은 가을의 한가운데를 보여준다. 여름이 오는 신호를 주는 감자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하지만 이 밭의 무는 우리가 아는 통통한 겨울 무가 아니다. 길쭉하고 얇은 단무지용 무다. 옆 마을 연곡에 단무지 공장이 있어, 몇 해 전부터 계약 재배를 하고 있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리고 허리도, 관절도 예전 같지 않다며 이제는 아예 밭에 나가시지 않는다. 대신 수확한 무는 그대로 공장으로 향하고, 할머니는 평생 지어온 농사를 유통까지 잇는 방식으로 이어가신다.


“사닥(새댁)은 나이가 몇이여?”
“76년생 용띠요.”
“아이고 나랑 띠동갑이네. 우리 딸도 사닥이랑 같어.”


돌계단 위에서 만나면 그렇게 웃으며 말을 건네시던 할머니. 손주 자랑은 끝이 없었고, 자식 키우며 농사지어 벌던 돈은 이제 다 병원에 갖다준다며 헛헛하게 웃으셨다. 자글자글한 얼굴의 주름, 거칠고 마른 손엔 세월의 무게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할머니, 파지 무 좀 주워가도 돼요?”
“이쁜 걸 먹어야지 흙에 뒹군 거 먹으면 쓰나!”

"금방 땅에서 나온 건데요. 괜찮아요~"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외출했다 돌아오니 현관 계단 앞에 통통한 무와 가지, 호박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께서 가져다 놓으신 게 분명했다.

이것이 시골의 인심이고, 조용한 마음의 나눔이라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따뜻하면서도 몽글해졌다.

두 해가 더 지났고, 올해도 어김없이 삼모작은 이어진다. 그런데 서울에서 놀러 오신 친정엄마가 마실을 다녀오신 뒤, 낯빛이 어두워진다.


“너, 밑에 주황 지붕 집 할머니 돌아가신 거 알았어?”
“……네?”


몇 달 전,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셔서 떠나셨다고 한다. 할머니 댁에 인사드리러 가신 엄마는 아드님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셨다. 문득, 어느 여름날 돌계단 위에 앉아 땀을 식히시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무릎을 어루만지며 “사닥이 참 곱다”고 웃으시던, 그 따뜻한 여운이 아직도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

이제 그 텃밭도, 그 들기름도, 그 무꽃도 할머니 없이 계절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그 땅엔 여전히 봄이 오고, 여름이 자라고, 가을이 익어간다.
돌계단 너머, 그 계절들은 말없이 흐르면서도 분명히 누군가의 시간을 품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또 하나의 계절을 배우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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