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상처를 입은 우리는 은신처를 찾았다.
으리으리한 은신처엔 없는게 없었고 우리가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매일같이 다양한 이벤트와 액티비티로 몸과 마음을 바쁘게 만들기도 했다.
좀 진정이 되다가도 가끔씩 치밀어 오르는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 때문에 새로운 기항지에 도착하는 것도 이번 여행에서는 반갑지만은 않았다. 지치고 피곤해 집에서 쉬고 싶는데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밖에 나가 놀자고 부추기는 친구들 같았다.
며칠 동안 잠을 거의 못 자고 신경을 쓰기도 했지만 아이들 앞에서 티 낼 수 없어 속으로 끙끙 앓다가 결국 독한 감기에 걸렸다.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던 여행에서 모든 걸 도둑 맞고 크루즈에서 감기 몸살이라니,,, 마음과 몸이 만신창이가 된 난 가족들 앞에서 또 많이 아파할 수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 미안했다. 침을 한번 삼킬 때마다 복숭아씨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기분이었다. 다음날 아침엔 열이 나고 온몸이 쑤시고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크루즈에 승선하기 전 피사에서 상비약으로 두통약을 사긴 했지만 턱도 없었다.
크루즈 안에 메디컬 센터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크루즈 병원의 운영시간은 상시 오픈은 아니었다.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2~3시간 동안 진료를 보고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따로 연락을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메디컬센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일반 의원 규모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배 안에 병원이라니 신기했다. 동네 의원을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카운터에서 접수를 하니 앉아서 대기하라고 한다. 센터엔 나뿐만 아니라 열이 나는지 보채는 아이도 보이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목발을 짚고 들어오신 할아버지도 계셨다. 하기야 4,000명이 일주일 동안 살고 있는 마을인데 병원이 필요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이탈리아 국적의 의사인데 진료는 영어로 본다. 감기 몸살에 뭐 특별한 처방이 있겠냐만은 외국에 와서 그것도 크루즈 안에서 외국인 의사에게 진료를 보니 아픈 와중에도 신기하기만 했다.
려환이도 출국 일주일 전 어린이집에서 넘어져 턱을 꿰매는 작은 수술을 했는데 실밥을 풀지 못하고 여행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수술자국을 완화시키는 연고와 드레싱 도구를 모두 챙겨 왔는데 그 물건들 또한 트렁크에 넣어 둬 도둑맞은 상태였다.
나의 진료가 끝나고 의사에게 려환이 턱을 보여주고 상황도 설명했더니 친절하게 드레싱을 해주신다. 실밥은 하선하기 전 오면 뽑아주겠다고 하셨는데 만약 아이가 무서워하면 엄마가 직접 뽑아줘도 된다고 하셨다.
의사의 처방대로 감기약을 받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처방받은 알약이 타조알같이 크다. 서양사람들은 목구멍도 큰 건가? 안 그래도 침 삼키기 힘든데 약을 먹는 것도 곤욕이었다. 하지만 친절한 진료와 약처방까지 모두 무료 서비스라고 하니 너무 감사한 일이다.
다음날이 되어 열은 좀 내렸지만 여전히 몸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스페인 '팔마 데 마요르카'기항이 있는 날. 신랑과 신혼여행 왔던 장소이다. 이제 둘이 아닌 넷이 되어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이렇게 기념적인 날 힘을 내보기로 한다. 여전히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배에서 내렸다. 부족한 생필품과 옷가지를 조금 더 구입하고는 신랑이 안내하는 대로 팔마 관광지 주변을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도착한 곳.
Bi Bap
한국 식당이었다.
이곳에 한국식당이 있었다니,,,
신랑은 나 몰래 한식당을 검색했던 것이다.
웬만해서는 해외여행 중 한국식당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음식도 잘 먹지 않는 우리 가족인데,,
우리 가족이 기운 내길 바라는 신랑의 마음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아이들도 당연히 기뻐하며 펄쩍이며 좋아한다.
BiBap(비밥)은 한국인 여자 사장님이 주인이셨는데 어렸을 때 이민 와 정착하셨다고 한다. 이곳에선 한국 손님을 보기 힘들다며 무척 반겨주셨다.
우리는 김치찌개와 비빔밥을 주문했다. 뜨끈한 찌개와 밥이면 충분했다. 오랜만에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에 흰쌀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으니 약기운이 퍼지는 느낌이다. 누가 한국사람 아니랄까 봐 콧잔등이에 땀이 맺히니 이제야 살 것 같다. 땀을 뻘뻘 흘리며 먹고 있는데 사장님께서 큰 유리잔에 담긴 차를 가져다주셨다.
꿀과 생강차였다.
스페인에서도 감기 몸살이 나면 생강차를 마신다면서 퉁퉁 붓고 골골해하는 한국 손님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건네주신 생강차는 정말 감동이었다.
크루즈의 병원 메디컬센터 의사도 팔마 한국식당의 사장님도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가족도 모두 나의 주치의였다. 해외에 나와 아프면 정말 서럽다는데 난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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