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언젠가부터 비행기를 이용할 때, 앞 좌석에 앉기가 어려워졌다. 앞 좌석을 선호하는 승객이 많아지자, 항공사들이 앞 좌석에 더 비싼 가격을 매겼기 때문이다. 웃돈까지 내면서 앞 좌석에 탈 생각은 없다. 비즈니스석도 아니고, 어차피 똑같은 이코노미석인데 따로 추가 금액을 지불하는 건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다. 비행기에서 빨리 내리는 승객에게, 항공사가 수화물을 먼저 뱉어주는 건 아니거늘, 비좁은 답답한 비행기에서 착륙과 동시에 벨트를 풀고 벌떡 일어서는 승객들을 보면 최대한 빨리 탈출하고 싶은 욕구 일까도 생각해 본다.
비행기 통로를 따라 뒷좌석으로 천천히 걸어갈 때면, 이미 좌석에 앉아있는 승객들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비행기는 처음이라는 듯 들떠있는 어린 꼬마, 귀찮은 출장길이 분명한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벌써부터 잠을 청하는 중년의 아저씨와 비행기 이륙 전 모습을 SNS에 담아내려고 사진 찍기에 분주한 젊은이들, 그리고 지도를 보며 여행의 기대에 대한 수다를 즐기는 가족들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늘 비행하게 되는구나. 하지만 특별한 관계는 없다. 우연히 나의 옆 좌석에 앉은 승객은 그저 화장실 오갈 때 "Excause me~"를 여러 번 말해야 하는 불편을 주고받는 존재일 뿐이다. 길게는 10시간 넘는 여행길이 되기도 하지만,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의 낭만은 역시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인가 보다.
크루즈는 다르다. 같은 배에 탄 수천 명을 일일이 다 알 수는 없지만 승선하는 첫날부터 뭔가 모를 묘한 여유에서 오는 동질감이 재밌다. 아침 운동 때면 만나는 독일인 부부와 일본인 커플은 언제나 환한 미소로 먼저 인사를 건넨다. 통성명은 기본이고 가끔은 SNS 친구를 맺기도 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자주 마주치는 키 큰 크로아티아 아저씨는 농구로 여러 번 함께 게임을 하더니 자기 고향에 놀러 오면 연락을 하라고 한다. 객실 앞 복도에서 종종 마주치는 옆방 꼬마에게 "Hi~" 손을 흔들었더니, 언젠가 사탕을 내밀었다. 저녁 식사 때면 옆 테이블에 앉는 젊은 또래 커플이 오늘은 왠지 안 보인다. 지정석이어서 식사를 거르지 않는 이상 와야 할 텐데, 무슨 일이 있나? 뷔페로 올라갔나? 괜히 궁금해지기도 한다. 또 다른 테이블에서는 노년의 부부동반 모임인지 근사하게 차려입은 백발의 노인들이 와인잔을 기울이며 건배를 한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자, 식사에 늦을 정도로 기항지 관광이 재밌었다는 이야기가 흘러든다. 테이블은 다르지만 오늘 나도 다녀온 기항지 이야기는 합석하고 싶을 정도로 친근하다.
첫날 승선할 때는 분명 4인 가족 여행이었는데 하루이틀 지내다 보니 아는 사람이 늘었다.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같은 여정을 함께하는 이들이 수천 명인 셈이다. 어찌 보면 사실상 대규모 단체관광이라고 봐도 될 것도 같지만, 크루즈 여행은 뭔가 더 특별하다. 여행지가 계속 바뀌지만, 숙소는 동일하다. 잠드는 캐빈은 물론, 식당, 극장, 운동시설, 도서관, 병원, 주점까지 그대로 옮겨가니 가능한 일이다. 아니 숙소가 이동한다는 것보다는 마을이 이동한다고 봐야 하나. 비록 움직이는 마을에 이장님은 없지만, 우리에게는 선장님이 있다. 하루종일 항해하는 날 저녁 선장이 근사한 특별메뉴로 한턱낸다고 특별 방송이 있다. 당연히 이미 크루즈 비용에 포함된 내용인걸 알면서도 승객들은 환호하며 좋아한다.
거대한 크루즈가 기항지에 들어갈 때면, 항구가 분주해진다. 기항지 관광을 위해 대부분의 승객이 하선하지만 크루즈는 쉬지 않는다. 승객과 선원 수천 명을 위한 신선한 식재료를 배로 옮겨 싣고 또 정비를 하고 짠물에 뿌옇게 된 창문을 닦는다.
한 번에 모든 마을 주민을 만나볼 수는 없지만, 그렇게 누군가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행복을 누리고 있구나, 묘한 동질감을 다시 느껴본다.
시간을 거스르며 10시간 이상을 날아온 비행기가 착륙하면 무언가 아쉬움을 안고 내리지 못하는 경우는 단연코 없을 테다. 그저 이동을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루즈에서 며칠을 함께 지낸 승객, 움직이는 마을주민들은 무언가 아쉬움이 가득하다. 내려야 할 목적지에 도착해도 최대한 오래 머물다 하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갑판 위 카페에 앉아 매일 아침 마시던 카푸치노를 되도록 천천히 마시면서 생각한다.
크루즈에서 하선한다는 건, 정든 마을을 떠난다는 것, 그렇게 다시 크루즈 마을로 되돌아올 이삿날을 꿈꾸며 무겁게 발걸음을 떼어낸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가 한번', '내 생애 한번', '죽기 전에 한번'이라는 수식어로 크루즈 여행을 가고 싶어 한다. 크루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즐거우며 저렴하다.
크루즈 여행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이 글은 쓰면서도 다음 크루즈 여행을 다시 계획할 정도로 가씀 뛰고 또 가고 싶은 여행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언젠가’가 아닌 ‘지금’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길 간절히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