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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Oct 19. 2024

고도로 발달한 핵무기는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지구 최후의 날 (1951)

    영화 <지구 최후의 날>은 외계의 비행접시가 미국의 수도에 착륙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형적인 UFO의 형상을 재현한 이 비행접시에서는 외계인 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능숙하게 영어를 사용하는 백인(클라투)과 이족 보행하는 휴머노이드 로봇(고트)이 내린다. 압도적인 등장과는 다르게, 클라투는 등장과 함께 권총에 맞아 쓰러지고서는 앰뷸런스로 인근 군병원으로 호송된다. 시속 4000마일로 날아다니는 비행접시를 타고 온 외계인 치고는 다소 허술하다는 인상을 가지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굳이 가명을 사용하면서까지 인간 사회속에 섞여 살아가고, 택시를 타고 도주하다 잡혀 군인의 총에 맞아 죽는 등 클라투의 ‘연약함’과 그가 가진 ‘절대적 힘’의 간극은 너무나 커 보인다.


    이러한 간극이 불러일으키는 의문들은 영화 <지구 최후의 날>이 기독교적 서사를 모방하는 데에서 기인하고 있다. 클라투의 행보를 짚어가다 보면, 신약 속 예수의 궤적과 일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클라투는 ‘카펜터’(목수라는 뜻. 예수의 직업도 목수였다)라는 이름으로 인간 사회를 돌아다니며 여러 이적(인외(人外)의 순수함을 가진 다이아몬드를 주고, 30분간 지구의 모든 전기를 중지시키는 등)을 행한다. 그는 자신이 지구를 떠나고도 자신의 의지를 이어받을 사도들(반하트 교수를 비롯한 다국적 과학자들)을 찾는다. 예수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고 삼일 후에 부활했듯이, 클라투도 미국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고 우주선의 신비한 힘에 의해 다시금 부활하여 자신의 사도들과 군인들 앞에 선다.


    영화가 스토리의 허점을 감수하면서까지 기독교적 서사를 모방하는 것은, 클라투를 예수, 더 나아가 종교적 구원자의 위치로 올려놓고자 하는 의지로 보여진다. 그럼에도 이 두 서사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하는데, 클라투는 예수와는 다르게 희생과 사랑의 서사가 결여되었다. 말하자면, 예수는 ‘지구 위’의 원죄를 대속하는 구원자라면, 클라투는 ‘지구 밖’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경찰이자 심판자이다. 심판자의 성격을 지닌 클라투는 폭력(고트)을 통해서 평화를 구현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클라투와 예수의 궤적이 일치함에도 그 성격이 매우 다른 것은, 클라투가 지니고 있는 ‘절대적 힘’의 근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머나먼 행성을 여행할 수 있는 클라투의 우주선. 30분간 지구의 모든 전기를 끊을 수 있는 힘. 죽음에서 되돌아올 수 있는 권능. 압도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고트. 이 모든 것들은 ‘원자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클라투는 원자력을 독점하는 집단(이를테면, 1950년대의 미국)을 의인화 한 것이며, 고트는 원자력이 지니고 있는 파괴적인 힘(이를테면, 원자폭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클라투가 고트를 통해 우주적 평화를 구현하려는 행위는, 원자폭탄이라는 압도적 힘을 바탕으로 지구적 평화를 구현하려는 미국의 전략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원자력에 대한 미국의 독점이 무너지고 나서는 NPT(핵확산방지조약)가 그 의지를 이었다고 보았을 때, NPT 체제는 곧 클라투가 주장한 우주경찰시스템의 현실적 재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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