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시대의 풍경이 되다>를 읽고...디자인을 생각하다
4년 전 한 일본 자동차 브랜드에 다니는 한국인 디자이너를 만난 적이 있다. 한국 기자들이 외국 자동차업계 사람을 만나면 보통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현대차는요?”
그날도 그랬다. 내가 물었는지 다른 이가 물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현대자동차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이번 쏘나타(YF) 디자인은 대단히 혁신적이고, 몇 단계를 한꺼번에 뛰어넘었는데 이다음 쏘나타는 어떤 디자인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 뒤 2년쯤 지나 현대차는 확 달라진 새 쏘나타(LF)를 내놨다. 이전 YF쏘나타가 울퉁불퉁하고 선이 굵었다면 LF쏘나타는 선이 단단해지고 얌전해졌다. 사실 YF쏘나타 디자인은 출시 때만 해도 너무 독특해 ‘벌레’ 모양 같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낯선 디자인 때문에 그 이전 모델(NF)을 계속 사겠다는 이들이 나올 만큼 파격적이었다. 그래도 잘 팔렸다!
쏘나타의 ‘형제 차’ 기아자동차 K5는 다른 길을 택했다. 처음 나왔을때는 쏘나타보다 더 잘 팔린다고 난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해 나온 2세대 K5의 디자인은 일반인 눈으로 볼 때 이전 1세대와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전보다 다듬은 수준이었다. 보통 ‘올뉴’ 등 수식어를 붙이면서 확 달라진 디자인을 선보이는데 말이다. 도로 위에서 K5 가운데 1세대와 2세대를 구분해낸다면 그는 정말 차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봐야할 정도다.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이 물음에 대한 힌트가 담긴 책이 최근 출간됐다. <자동차, 시대의 풍경이 되다>(책세상 펴냄), 오랫동안 현대차에서 컬러디자이너로 일한 이문석씨가 시대에 따른 한국 자동차의 발달과 디자인을 묶어 책을 썼다. 책 서문엔 재미난 구절이 담겨 있다.
“얼마 있으면 새로 나올 신차의 디자인을 결정하는 품평장. 신차 개발에 참여한 실무 디자이너와 중역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드디어 사장님이 들어오셨다. 사장님의 첫마디 ‘새로운 게 뭐죠?’ 항상 똑같은 말씀이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새로운 것이 뭐냐는 질문이다. 그러면 담당 디자이너가 나서서 기존 차량과 비교하면서 무엇을 바꾸었고, 이렇게 달라보이게 했는지를 줄줄이 읊어 댄다. 들어보면 자신이 했던 기존 디자인의 흠을 잡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학생처럼. 실제로는 이전 디자인도 참 좋았고 잘 팔렸다. 그렇지만 새것이 낫다고 설득하려면 이전 것의 흠을 잡아야한다."
신차 디자인 품평회장이 서슬 퍼런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새로운 게 뭐죠?’ 라는 말은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문석씨는 외국인 디자이너는 이런 모습이 이상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같이 일하던 한 외국인 디자이너는 이 모습이 참 이상하다고 말했다. 왜 매번 이전 것과 완전히 다르게 하느냐고. 기존 것을 수정해 좀더 세련되게 다듬으려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필자는 확 다르게 해야 새 디자인 같아 보이고 좋지 않느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외국인 디자이너의 생각은 이미 갖고 있는 기존의 자원을 활용해 개선하는 것이 효율적으로 품질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판단하는 태도였다. 확실히 외국인 디자이너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다."
기아차는 2006년 독일 아우디 출신 자동차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했다. 그 뒤 기아차의 디자인은 바뀌었다는 평을 받는다. 기아차의 모든 차가 일관된 디자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지난해 5월 2세대 K5를 출시하면서 슈라이어 부사장은 디자인에 대해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떠도는 얘기가 있다. ‘새로 만드는 것보다 조금 고치는 것이 더 어렵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도 어렵지만 주어진 상황과 조건 속에서 작은 변화를 통해 새로운 디자인적 가치를 창조해내는 일이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는 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슈라이어는 이후 현대차까지 총괄하는 디자인 수장이 됐다. 물론 슈라이어가 온 뒤 자동차 품평회장의 모습이 변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K5의 디자인이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을 보면, 이제는 “새로운 게 뭐죠?”라는 의례적인 질문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아마도 현대차그룹은 외부에서 디자이너를 영입한 게 성공했다는 평가를 한 게 분명하다. 지난해 말 럭셔리 차급인 벤틀리의 전 수석디자이너 루크 동커볼케를 영입한 데 이어, 최근엔 같은 벤틀리 출신 이상엽씨를 데려왔다. 현대차 내부에서는 외국인 디자이너가 현대차 디자인에 부족했던 2%를 채웠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문석씨는 책에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우리 디자이너들이 철학이나 정체성이라는 과제를 두고 헤매는 것은 당연하다. 정체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기업의 수장은 외국인 디자이너에게서 그 해답을 얻으려 하고 있다. 이 일은 2000년대 넘어서면 시작되었다. 현대기아차가 통합되면서 차별화의 문제가 시급해졌고, 양적인 성장이 한계에 다다른 시점에서 질적 도약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설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디자인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디자인이 전략적인 논의를 시작했지만 아쉽게도 외국인 디자이너를 수장으로 영입해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 자동차 업체들도 외국인 디자이너를 고용해 수준을 끌어올리고 있다. 지난 4월에 가본 베이징모터쇼에서는 지리 자동차가 2011년 영입한 호버리 디자인 부총재를 내세워 중국차를 세계화하겠다고 자신있게 발표할 정도였다. 피터 호버리는 볼보와 포드의 디자인 책임자를 거쳤다.
“세계화가 확대되면서 자동차는 속도 겉도 거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비슷해졌다. 이런 상황이 심화돨수록 기업의 고유성을 더욱 강조할 수 밖에 없다. 고급 브랜드들이 우수한 품질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방식은 그들의 고유성에 있다. 질적으로 한단 계 더 도약하고자 한다면 국내 기업의 이름에 걸맞는 고유한 디자인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선진기업처럼 고유한 이미지를 가져야 한다.” (이문석)
한국 축구는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을 영입해 4강에 진출했다. 그 뒤 국내 지도자들을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몇몇 지도자는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 다시 슈틸리케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그가 떠난 뒤 한국 축구는? 디자이너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