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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란 Apr 19. 2017

즐거운 오독 (誤讀)


나는 시력이 나쁜데도 안경을 안 쓰고 다닌다. 그래서 오독률이 높다.

한 번은 버스를 타고 퇴근을 하는데, 길 건너편에 <못 받은 정 받아 드립니다>라고 쓰인 팻말이 있는 게 보였다.  "오?  무슨 광고지? 못 받은 정을 어떻게 받아주나?"하고 내내 궁금했다. 그리고는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았는데, 대부분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상상들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출근하면서 다시 그 길을 지나는데, 이번에는 그 팻말이 건너편이 아니라 길 이편에 있어서 깨끗이 잘 보였다. 앗, 원문은 <못 받은 쩐 받아 드립니다>였다.  빚을 대신 받아준다는, 뭔가 핏내가 나는 무서운 광고였던 것이다. 어젯밤에 했던 그 따뜻했던 상상들이 갑자기 무색해졌다.

음, 역시 이 세상은 좀 덜 분명하게 보이는 게 더 좋아, 안경을 안 쓰고 다니는 변명이 하나 더 늘어났다.


언제나 글자 자체를 틀리게 읽어서 오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오독이 되는 경우도 많다.  우리집에서 나와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이백 미터 정도 되는 그 길 가운데 작은 교회가 하나 있다. 난 늘 새벽반 수업이 있으므로, 조금만 일찍 나가면 그곳 새벽기도에 참여할 수 있다. (물론 게을러서 가물에 콩 나듯 간다, 그래도 그곳에 교회가 있어서, 언제라도 새벽기도를 갈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


작년에 한 번 새벽기도를 갔는데, 예배당 벽에 <전 교인 성경 백독>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게 보였다. 깜짝 놀랐다. 그곳은 감리교회인데, 새벽기도뿐 아니라 매일 저녁 8시에도 예배를 드린다. 교회는 작지만, 교인들의 영성이 높아서, 모든 교인들이 평생 성경을 백 번씩 읽는 것을 목표로 하자고 플래카드를 걸어놓았구나, 굉장한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는, 내 인생의 목표 속에 성경 백독을 집어넣고, 작년부터 플랜을 가동 중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또 가물에 콩 나듯 들린 그곳에서, 이번에는 <전 교인 성경 135독 달성>이라는 플래카드를 보게 되었다. 앗, 모든 교인이 평생에 성경을 백독씩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 년 동안 그 교회에 다니는 전 교인이 성경을 읽는 횟수를 다 합쳐서 백 독이 되게 만들자는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의미 오독이었다.


문장 이해력이 떨어져서 오독을 한 관계로, 나는 뜬금없이 평생 성경 백독 하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될 것 같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 평생에, 그저그저 이런 오해, 이런 오독만 있어라... 하는 마음이다.

역시 오독에 관한 시가 하나 있어서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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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오독 (誤讀)



영수증을 정리하다 흠칫 멈춘다

언제 이런 걸 샀지?

첨가물 없는 生... 4,800원


질투나 오만 같은 신내도 없고

좌절이나 배신 같은 쓴맛도 없고

무엇보다 뒷맛이 깔끔해서

늘 사랑받는 삶을 겨우 4,800원에 사 왔다니

이런 횡재가 없다


원한다면 당신에게도 사다주고 싶다

어쩌면 우리 동네에서만 팔 수도 있다

전화하시라


첨가물 없는 生

다진 마늘

작은 통 3,200원, 큰 통 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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