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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란 Aug 26. 2016

경사


때론 거슬러 오를 수 없는 경사가 있다.


어스름이면 골목 어귀에 자리를 잡고 "군고구마 좀 사주세요", "군고구마 좀 사주세요" 하고 외치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군고구마를 좋아하던 나였지만, 차마 그곳을 지날 수 없어 늘 그 골목을 피해서 돌아다녔다.  사라는 말과 사달라는 말, 한 글자 때문에 그와 나 사이엔 돌이킬 수 없는 경사가 생겼다.  그냥 사이가 벌어지는 건 좁힐 수도 있지만, 이렇게 경사가 지고 나면 멀리 미끄러질 일 밖에 안 남게 된다.


만나자고 말하는 사람과는 선뜻 만나게 되지만, 만나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울컥 거부감이 들어 뭐라도 못 만날 핑계를 찾게 된다.


습관적으로 "그래, 내가 밥 같이 먹어줬다", "내가 같이 가줬다"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농담일 경우도 있지만, 가끔은 그 경사를 즐기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살수록 그런 높낮이가 불편해진다.


얼마 전 민중을 개돼지로 여긴다고 말했던 고위 공직자 때문에,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부쩍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진 듯하다. 점심 인사로 "오늘 점심 사료 먹었냐"는 말이 유행한다니 씁쓸할 뿐이다.  굳이 개돼지까지 가지 않아도,  굳이 점심 사료까지 가지 않아도, 일상 속의 미미한 경사조차도 불편해지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까다롭다 싶지만, "~~ 해주고", " ~~ 해달라"라고 할 일 없이 그냥 밋밋하고 반듯한 관계 속에서 하루하루가 지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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