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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란 Oct 25. 2022

접시 다이어트 26 - 저녁 반찬

접시 다이어트 26일 - 65.8kg (100g 감량, 총감량 4.7kg)

아침마다 달력에 체중을 적어놓는데, 이제는 남편도 아침에 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달력에 쓰인 내 체중을 보는 것이다, 신기하단다^^.



어제 점심 - 김밥 한 줄 (김가네 멸추 김밥)


어제 저녁

찐 야채 (단호박, 호박, 당근) / 시금치 / 등심구이 / 김치



오늘 아침 - 사과, 땅콩 (아침 먹을 시간에 졸려서 도로 20분 자느라 제대로 못 먹었다, 일부러 안 먹은 거 절대 아님^^)



오늘 낮

찐 야채 (단호박, 호박, 당근) / 만두 / 계란 반숙 / 두부조림 / 김치



접시 다이어트 글을 올리면서 지인들도 꽤 보기 시작했는데, 접시 자체에 흥미를 보이는 친구들이 제일 많았지만, 그 다음으로 관심을 많이 보인 것은 첫날 올린 우리집 저녁 밥상이었다.

다시 올려보면

(접시 사기 전)


(접시 산 후)


이 두 장의 사진이었는데, 친구들의 반응은 내가 정말로 밥을 해먹는 사람이라는 게 너무 놀랍다는 것이었다, 호호. 먹는 걸 좋아하는 줄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매일 저녁을 제대로 반찬 해서 먹는 사람이라는 건 별로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 많았다. 날마다 메인 반찬이 있고, 나물도 두 가지 놓으려 하고, 국도 늘 새로 끓이는 건 아니지만 끊이지는 않는다.


나는 뭐 딱히 굉장히 바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가한 사람도 아니다. 하루 다섯 시간 화상수업이 있고, 그 수업을 위해서 두 시간은 준비를 해야 한다(늘 새 자료를 만들어야 하므로). 그것 말고도 삼일에 한 번 정도는 사이트에 자료도 올려야 하므로, 주 5일만 친다면 하루에 8~9시간은 일을 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일을 한다. 집에서 하니까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지만, 일의 양이 주는 건 아니다.


일을 하면서도 밥을 이렇게 열심히 해먹게 된 건 십 년 조금 넘는다. 결혼 생활을 대충 30년쯤 했으니까, 그 전 약 15~20년은 이렇게 해먹지 않았다는 얘기다.

웃기게 들리겠지만, 나는 늘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은 지금도 그렇다^^. 어린 시절 위인전을 너무 많이 읽은 부작용이다, 하하.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공부를 더 해야 하고, 일도 더 해야 하는데, 식구들이 너무 내게 의존했다. 결혼 후 20년간은 그 사실이 너무 힘들었다. 엄마는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별로 인정하지 않고 늘 나를 찾으셨다. 학원으로 전화하셔서 당장 오라고 하실 때도 많았다. 남편은 내가 차려주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았다. 나는 늘 살 빼기에 애를 써도 남편은 늘 북한사람처럼 말라있다. 하루 세 끼 중 한 끼만 먹으니 살 찔 틈이 없다. 그 시절엔 학원 수업도 여덟 시간씩 되었는데, 엄마는 내가 없으면 운동을 안 하시고, 남편은 내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고... 학원에서 엄마집에 가서 엄마를 모시고 남산 가서 배드민턴 치고 모셔다드리고 다시 우리집으로 가면 종일 버스를 12번 환승했는데, 그렇게 집에 가면 남편이 다크써클과 함께 날 기다리고 있었다.  딱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44세에 도망을 갔다. 영어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우선은 필리핀으로 갔고, 거기서 6개월 동안 영어 기초를 갖춘 후 캐나다로 가서 1년 있을 예정이었다. 결혼 초, 중국 어학연수에 대한 기억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에, 다시 그렇게 행복한 시절을 지내고 싶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책만 보고 공부만 하고, 밥도 다 남이 해주는 것만 먹고.


그런데 막상 가보니, 가족이라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 밥을 먹어도 딱히 맛있지도 않았고, 공부도 생각만큼 재미있지 않았다. 중국 어학연수가 좋았던 건 아마 남편과 함께여서였던 것 같다. 필리핀에서 4개월 반쯤 된 어느날, 한인교회를 갔는데 옆자리에 주부로 보이는 어떤 여성이 허겁지겁 와서 앉았다. 그런데 그녀가 자리에 급히 앉는 순간, 따끈한 밥냄새가 풀썩 일어났다. 집에서 막 밥을 해놓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따뜻한 밥냄새가 어찌 그립던지 울컥 눈물이 났다, 아, 남편 밥 해주고 싶다... 그게 그 순간에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당장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바쁜 일상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불평을 상당히 덜하며 살았다. 운동하려고 날 기다리는 엄마가 있다는 것이, 또 밥 주기를 기다리는 남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들이 내 옆에 없을 때 깨달았다.


세월호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주부 수강생이 전한 아침풍경을 잊을 수 없다. 남편이 욕실에서 나오더니 씩씩대며 말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또 자신의 칫솔을 썼다고. 그때 이 주부 수강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들이 아무 탈 없이 우리집에서 자고 일어나, 당신 칫솔로 이를 닦고 나갔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동스럽냐고.


이제는 엄마가 안 계셔서, 배드민턴을 같이 쳐드리지도 못한다. 언젠가는 나나 남편도 먼저 갈 것이다. 아마도 그때쯤 우리는,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던지를 기억하기보다는, 우리가 함께 먹던 풍성한 저녁을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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