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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란 Feb 06. 2023

왕필명 선생님을 기억하며

영원한 스승

왕필명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https://chumo.daqda.kr/uh/H2_1014870085926


나는 왕필명 선생님의 웃음을 참 좋아했다. 이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자꾸 눈물이 나려 한다.

저녁 수업 전에 부지런히 가서 겨우 2분, 마지막 모습을 뵙고 왔다.

마음이 어수선해서 뭐라도 끄적여야 할 것 같다.


왕필명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중문과 학생이었고,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어는 꽤 좋아해서, 중간중간 "중국어를 열심히 해봐?" 하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왕필명 선생님이 종로에서 제일 유명한 강사였기 때문에, 고민 없이 가서 왕필명 선생님의 수업을 신청했다. 하나로는 성이 차지 않아 두 개를 신청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학회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주로 술을 먹던 시절이라 수업은 딱 3일 나가고 안 나갔다.


왕필명 선생님을 두번째 뵌 것은, 대학 졸업 후 타일공으로 일할 때였다. 흔히 말하는 노가다를 할 때였는데, 몸만 쓰며 일을 하다보니 공부가 하고 싶어서 수소문해서 왕필명 선생님께서 직접 여신 학원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그때 역시 한 과목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두 시간을 등록했다. 그런데 왕필명 선생님께서 날 보시더니, "이 엉터리 학생 또 왔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물론 내가 좀 특징 있게 생기기는 했다;;)

난 깜짝 놀라서, 이번에는 꼭 열심히 하는 학생이 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노가다를 하면서 학원을 다니기가 쉽겠는가;;  역시 삼일 다니고 안 나갔다.


왕필명 선생님을 세번째로 뵌 것은, 어학연수를 다녀와 중국회사에서 통역비서로 5년 반 일한 후, 사장님이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비리를 많이 알고 있는 내가 먼저 그만둬줬으면 해서 퇴직을 하고 나서, 37살의 나이로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였다.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지 못하는 성격의 나로서는, 반드시 내가 말단직원이어야 했고, 회식이 없는 직장이어야 했고, 승진하지 않는 직장이어야 했다.

적성에는 출판사가 맞았지만, 출판사에서는 최소한 팀장으로 와야 한다고 해서 갈 수가 없었다. 승진 안 하고, 중국어를 사용하는 직장, 그 당시 내 나이에는 강사 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왕필명 선생님이 계신다는 이얼싼으로 찾아갔다. 왕필명 선생님을 거쳐간 학생이 수천명일 텐데, 설마 이번에는 나를 잊으셨겠지, 마음 편하게 가서 면접을 봤다. 그때는 이미 어학연수도 다녀왔고, 중국회사에서 통역비서로 5년 반이나 일한 후여서, 내 중국어는 상당히 들어줄 만했다. 가볍게 면접을 마치고 나가시면서, 왕필명 선생님은 문을 나서기 전에 뒤돌아선 채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엉터리 학생 중국어가 많이 늘었네"

나는 그 순간, 학생 하나하나를 진심으로 대하는 선생님에게 탄복했다. 그야말로 왕필명 선생님이 내 평생의 사부가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강남 이얼싼에서 왕필명 선생님과 함께 일하던 이년은 참으로 행복했다. 수업이 없는 공강시간이면 들어가서 졸지언정, 들을 수 있는 한 왕필명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려고 애썼다. 선생님의 웃음이 좋았고, 발음이 후지다고 학생들을 야단치는 정성이 좋았다. 모르는 게 나오면 그 자리에서 사전을 찾아서 알려주시는 것도 좋았고, 틀리는 발음은 끝까지 고쳐주려고 애쓰시는 모습도 좋았다. 물론, 내가 어법에 약해서, 어법의 대가이신 선생님께 하나라도 더 얻어배우려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다.

새벽이면 맥심 커피 두 개를 한번에 타드셨는데, 그걸 내가 타드리려고 애를 썼고, 스승의 날이면 누구보다 먼저 꽃을 드리고 싶어서, 학원 셔터 올리기 전에 대기하고 있었다.


나 역시 강사지만, 나는 수업준비는 열심히 하는 편이어도 학생관리는 전혀 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출석 체크를 안 해서, 출석체크 때문에 학원에서 지적도 많이 받았다. 아이들 학원이 아니고 성인 학원인데, 다 각자 알아서 하는 거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하고, 게을러서이기도 하고, 나 자신이 예전에 학원 다닐 때 학원에서 연락오면 불편했던 기억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왕선생님은, 학생이 등록만 하고 얼굴을 안 보이면 바로 전화를 하셔서 호통을 치셨다. 얼른 와서 환불해가고, 괜히 어디 가서 나한테 배웠다는 소리 하지 말라고. 나는 바로 선생님의 그런 자존심을 좋아했다.

오늘 검색해보니, 학원비 2만원 할 때, 어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선생님이 받을 1만원은 받지 않을 테니 학원에 내는 1만원만 내라고 했다고 회상하는 글도 보였다.

그 당시에는 학원에 토요반이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오랜 세월 토요일마다 무료 어법반을 열어서 학생들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우리가 왕필명 선생님을 강사가 아닌 선생님으로 기억하는 이유다.


하지만 花无千日红이라고, 행복한 직장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왕필명 선생님도 떠나시고, 이얼싼 학원도 이상해지고... 이얼싼에 꼰대스타일의 사장이 오면서, 밥 같이 먹자는 말에 옷장 속으로 숨다가 찍혀서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학원에서 잘리는 사태를 맞았다. 강사생활에 회의를 느껴서, 다른 직업을 가져볼까 궁리하던 참에 왕필명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께서는 "가져갈 게 있으면 학생은 오게 되어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돌아와서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나는 학생에게 줄 것이 있는가, 학생은 내게서 받아갈 것이 남았는가. 대답은 "내가 줄 것이 아직 남았다"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강사생활을 이어오고 있고, 거기에 대한 후회는 없다.


이제 왕필명 선생님이 안 계신다. 스승의 날에 찾아갈 곳이 없어졌다. 종로가 그리운 이유가 하나 적어졌다.

다시 왕필명 선생님의 웃는 얼굴을 본다. 후회없는 삶을 사셨을까. 오늘 가서 인사하던 많은 학생들을, 오늘까지는 안 떠나고 보셨을까, 궁금하다.


교회 다니시는 줄 몰랐는데, 영정사진 앞에 십자가가 있었다. 자세히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내게는 위로가 되었다. 좋은 곳에 가셨기를, 이제 아픔 없이 편안하시기를.

아, 벌써 왕필명 선생님이 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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