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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란 Feb 22. 2017

거짓말과 도둑질의 기억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거짓말을 많이 했겠지만, 여태까지 마음에 남는 거짓말은 두 번 있었고, 시험 부정행위는 정확히 두 번, 도둑질도 정확히 두 번 했었다. (거짓말과 시험 부정은 해본 이들이 많겠지만, 도둑질이란 항목은 조금 의아할 것이다;; )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치마바람이 몹시 거세던 시절이었다. 치마바람이라면 전교 1등이었을 우리 어머니가 우리 딸은 반에서 제일 좋은 아이랑 짝해 줘야 한다고 선생님에게 압력을 넣어서 나는 1, 2 학년 두 해 동안 정말 품성이 좋은 한 남자아이와 2년 동안 짝으로 한 책상을 사용했다. 2학년 마지막 시험 때, 시험 감독 선생님으로 다른 반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과학 시험이 시작되었는데, 12번의 답이 3번인지 4번인지 잠시 머뭇거려졌다. 다른 문제에 답을 다 한 후 12번을 들여다보며 장고에 들어갔다가 3번으로 마음을 굳히던 순간, 시험 감독으로 들어오신 옆반 선생님이 내 시험지에 얼른 3번을 체크하고 가셨다.  등심구이집이던 우리 집에 와서 고기 얻어먹은 신세를 갚은 셈이었나 보다.  


그날 저녁, 내 짝이 어머니 손을 잡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나는 그날 시험에서 백점을 맞았고, 내 짝은 한 문제를 틀렸는데, 알고 보니 내 짝은 여태까지 시험 때마다 집에 가서 나보다 많이 틀린 개수만큼 맞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날은,  선생님이 체크해주는 것을 본 내 짝이 그 한 대가 맞기 억울해서 엄마한테 이야기를 했고, 그 어머니는 아들이 거짓말을 하는지 확인하러 손을 잡고 우리 집에 온 것이었다.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그런 일 없었다고 말했다. 내 짝은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맞고, 다시 한번 거짓말하면 같이 한강에 빠져 죽자는 엄마한테 이끌려 한강 옆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고 들었다.  먼 훗날 그 아이가 연대 신학과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참 좋은 학교, 좋은 과였는데도, 혹시 나 때문에 인생에 대해 어려서부터 심각하게 생각해서 가게 된 길이 아닐까 내내 미안했다. 언제 꼭 한 번, 그때 거짓말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도둑질은 타일 일을 할 때 두 번 했었는데, 그때는 그걸 도둑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한 삼사 년 지난 뒤에, '어머, 그게 도둑질이었잖아?' 하고 문득 생각났으니, 내가 얼마나 나 자신에 대해 관대한지를 먼저 반성해야 할 듯하다.

나는 한양 기술 훈련원에서 타일 일을 배웠는데, 그 시절에는 건설 회사에서 기술 훈련원을 운영하면 감세 혜택을 주는 제도가 있어서 기술 훈련원을 운영하는 건축 회사들이 많았다.  점심도 주고, 대졸초임이 40여만원이던 시절에  차비 명목으로 20만 원까지 주었으니 꽤 좋은 대우였지만, 설립 목적 자체가 감세에 있었고 기술자 배출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술을 배우는 데는 딱히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특히 일하는 데 필요한 이런저런 도구가 늘 부족해서, 우리 조는 어느 날 회사 자재 창고에서 필요한 공구들을 훔쳐오기로 했다.  5명이 한 조였는데, 조장이 가서 공식적으로 지급되는 스펀지를 타내면서 사인을 하는 동안, 나머지 네 명은 전동 드릴과, 수평자 등을 훔쳐서, 스펀지에 둘둘 말아서 오는 게 계획이었고, 나는 그 과정에서 동선을 짜는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계획대로 전동 드릴과 수평자 등을 훔쳐서 잘 썼고, 나는 훈련 기간 내내 전동 드릴 등을 볼 때마다 뿌듯하고 흐뭇한 마음이 들곤 했다.


한 삼사 년 지나서,  나치 당원으로 일했던 어떤 사람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 십몇 년 후부터 그 행위들이 얼마나 반인류적인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는 글을 읽다가, 어떻게 그걸 깨닫는 데에 십몇 년이 걸릴 수 있을까 하고 분개하던 도중 갑자기 타일공으로 일할 때 전동 드릴 훔쳤던 일이 생각났다.  심지어 내가 얼마나 내내 그걸 뿌듯해했던지 그 느낌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아, 이런 거구나.  나치들도 이랬구나, 뿌듯했겠구나, 기뻤겠구나, 나쁜 건지 느끼지도 못했었구나, 나처럼...

그 이후로는 도둑질은 물론이고 거짓말도 최대한 안 하면서 살려고 노력했는데, 의외로 남들에게서 크고 작게 의심을 받게 되는 때가 있었다. 중국 회사에 다닐 때는 한국 직원이 나 하나였으므로, 명목은 통역이었지만, 실제로는 회계직원도 겸했는데, 내가 큰돈을 찾으러 은행에 갈 때마다 우리 사장님은 자리에 앉지를  못하셨다. 그게 내가 돈을 가지고 도망갈까 봐 걱정해서라는 걸 알고서는 무척 충격을 받았는데, 엄마가 내가 그 회사에 다니는 걸 너무 좋아하셔서 회사를 그만 둘 수는 없었다. 2년쯤 지나서부터는 사장님이 자리에 앉아서 편히 나를 기다렸고, 3년이 지나고서부터는 중국에 한 두 달 장기로 돌아갈 때도 내게 통장을 맡기고 가셨다.  日久见人心이라는 말을 믿고 버틴 보람이 있었달까.


얼마 전엔 학원 데스크에서 내가 복사용지를 돈 안 내고 들고갔다고 해서 눈앞이 노래지도록 억울했지만, 월말이라 등록하는 수강생도 많은데 CCTV 보자고 하기도 미안하고 해서 그냥 5만 원 물어주고 말았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를 되뇌면서...^^. 역시 日久见人心하리라 믿어본다.
기왕이면, 남아있는 날들 속에서는 내가 남을 속이지도, 남이 나를 속이지도, 내가 남을 속인다는 오해를 받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일만 하는 일상이 안타까워서 이지성 작가의 권장도서 목록을 들여다보다가 얼른 생각을 바꾸어, 어차피 유한한 시간인데 내게 뭔가를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성경을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집안에 장서가 천 권 이상 있는 집안의 아이들은 사회에 나가서 잘된다고 한다, 단 그 천 권 중 오백 권 이상이 시집인 경우를 제외하고, 하하.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하다고 한다, 단, 그 한 권이 성경일 경우를 제외하고.


남은 생 안에 얼른 성경 백독을 하는 게 목표인데, 기왕이면 퇴직하기 전에 백독을 했으면 좋겠다. 퇴직하고 할 일이 없어서 성경을 읽는 건 안 읽는 것보다는 좋겠지만,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못할 것 같다. 사회에서 아직 일하고 있는 사람일 때, 성경을 많이 읽어서 투명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뭔가 그 길을 좀 따라가고 싶은 사람이 되려면 얼른 부지런을 떨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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