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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란 Mar 15. 2017

한 가지만 잘 하면 먹고살 수 있다

오천 명을 먹여 살리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글임을 밝혀둔다^^.  

그저 예전의 나처럼, 나 같은 사람은 뭐해서 먹고사나 걱정이 태산 같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소용이 될까 싶어서 써보는 글이다.


내게는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너무도 치명적인 약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사하는 게 너무 어색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남과 밥을 같이 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박보검 배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물론 생긴 게 아름다워서 좋아하지만, 박배우는 이런 콤플렉스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밝음 그 자체인 듯해서 더욱 좋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늘 윽박지르며 인사를 시켰다. 그래서인지 나는 인사에 대한 느낌이 안 좋다. 특히 적당히 안면만 익힌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건 너무도 불편하다.   0.1의 시력을 가지고도 안경을 쓰지 않는 건, 길 갈 때 너무 잘 보이면, 인사해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적당히 아는 수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해야 하는 결혼식과 장례식은 정말이지 피하고 싶은 상황이이어서, 나는 여태까지 내 결혼식을 포함해서 총 열 번 정도 결혼식장에 가봤다. 최근에는(약 2년 전^^) 절대 빠질 수 없는 조카 결혼식 때문에 너무 애를 쓰다가 면역력이 떨어져서 이 나이에 뜬금없이 수족구병에 걸려서 손톱 10개를 몽땅 새로 갈기까지 했다.

인사도 인사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다른 사람과 밥 먹기를 피한다면 그것만큼 치명적인 것도 없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들어갔던 이랜드는 (요즘은 이런저런 악명이 높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참 좋은 직장이었다. 특히 술자리 회식이 없고, 고등학교 졸업자도 승진이 자유롭고, 관공서에 뇌물을 주지 않는 점이 참 내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청첩장 돌리지 말기, 차보다 집 먼저 사기 등의 사장님 권고도 맘에 들었고, 기혼여성은 한 시간 늦은 10시까지 출근하도록 하는 것도 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직장이 좋으면 무엇하겠는가, 인사도 늘 어정쩡하게 하고, 점심시간마다 남들과 밥 먹어야 하는 게 힘들어서 전전긍긍하던 나는 6개월을 울며 다닌 끝에 그만두고 말았다.
다른 직장보다 부당한 일이 훨씬 적었던 이랜드마저 다닐 수 없다고 생각하니 자괴감이 들었다. 이런 성격으로 뭐해서 먹고살까, 이 사회 어느 한 구석에서 붙어 살 수나 있을까.


그러던 중 한양 건설 기술교육원에서 타일 훈련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대학 다니던 시절, 혼자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모아놓은 신문 스크랩 중에 타일 일이 있던 것을 기억해내곤, 당장 가서 등록했다.


교육원의 타일 부문에는 선생님이 두 분 계셨다. 고등학교 교사를 하셨던 권선생님과 타일 기술자로 30년간 일해오신 송 선생님.  첫날부터 너무 재미있다고 느꼈던 것은, 권선생님은 타일을 딱 한 장만 붙이고 설명을 해주시고, 송선생님은 하루 종일 말씀 한 마디가 없으시다는 거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권선생님은 타일을 정말 딱 한 장만 붙일 줄 아셨다. 두 장만 붙여도 줄이 안 맞았다. 그래도 훈련 기간 두 달 동안 우리는 권선생님에게 설명을 들으며 타일 기술을 배웠다. 배운 지 이틀째 되던 날부터 우리 기술이 권선생님보다 좋았지만, 우리는 다 권선생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만큼 설명을 자세하게 잘 해주셨기 때문이다. 30년간 타일 일을 해오셔서 타일 붙이는 데는 정말 귀신같았던 송선생님은, 단 한 마디의 설명을 못 하셨다. 훈련생들이 질문을 하면, 송선생님이 시범을 보이시고,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권선생님이 풀어서 설명해주면, 우리는 거기에 따라 기술을 익혀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시스템이었지만, 그때 우리는 아무도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두 분 다 우리에게 너무 큰 도움이 되었고, 정말 필요한 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교육원에서 조금씩 나에 대한 자신감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아, 한 가지만 잘 하면 되는구나. 그러면 나도 먹고살고, 남에게도 복이 되게 살 수 있구나. 성격을 못 바꿔도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구나. 권선생님 자신이 타일을 못 붙이는 것만 창피해했다면, 송선생님 자신이 설명을 못 해주는 것에만 주눅 들어했다면, 나는 그런 배움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 두 분의 선생님은 각자 가진 장점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우리를 도와주었다.


현장에 나가자 그런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하루 종일 전기 콘센트 구멍만 뚫는 사람도 있었고, 하루종일 실리콘만 쏘는 사람도 있었고, 하루종일 콘크리트만 평평하게 수평 잡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구석구석에서 한 일들이 모이고 쌓여서 훌륭한 아파트가 되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손으로 하는 일을 좋아하고 잘 했다. 타일일도 너무 적성에 맞았고, 또 상당히 잘 하기까지 했다.  여자라서 양을 많이 붙이진 못했지만, 우리 대장은 모델 하우스에 타일을 붙이러 갈 때면 늘 나를 데리고 갔다. (모델 하우스에 타일을 붙이는 것은 돈 받는 일은 아니었지만, 모델 하우스를 잘 붙이면 일감을 따낼 수 있었다) 나는 하루종일 내가 잘 하는 일만 해도 먹고살 수 있었고, 그 일은 남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중국어 강사로 일하고 있는 지금도, 나는 늘 뭔가를 만든다.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게 재미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자료들은 정말 훌륭하다(이 부분에서 반감이 드신다면 정말 죄송하다;; ),  그림 성어 자료나 뉴스인강 사이트인 스크린 중국어를 소개할 때는 늘 자화자찬에 침이 마르고, 1200개의 성어와 속어를 끝말잇기로 이어서 만든 중국어 성어사전은 볼 때마다 뿌듯하다. 내 수업에 들어와서 내가 얼마나 어리버리한 지를 다 본 수강생들 말고;; 멀리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받으며, 내가 만든 자료들만 받는 수강생들 중에서는 나를 꽤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실체를 모르시는 것 같아서 너무 죄송하기도 하지만, 내 자료를 좋게 생각해주니 늘 감사하다.


나는 여전히 인사하기 불편해서 길을 돌아가기도 하고, 여전히 박 前대통령처럼 드라마를 보며 혼밥을 즐긴다. (요즘은 뒤늦게 대만 드라마 恶作剧之吻에 빠져서 무한 반복 시청 중이다. 박 前대통령이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았더라면 혼밥족에 대한 인상도 좀 좋아졌을 텐데... 하는 것이, 박 前대통령에 대한 여러가지 아쉬움 중의 하나이다 )  그러나 나는 결코 이 사회에서 무용한 사람은 아니다.  내 머리 속은 만들고 싶은 교재들로 그득하고, 내 일상은 이런저런 유익한 일로 채워져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우리 시사 학원 설립자 고 엄호열 회장님은 월남전 상이군인 출신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야 그 사실을 전해 들었다. 난 그저 연세가 드셔서 몸이 좀 불편하신 정도로만 여겼고, 더욱이 그분의 언행에서 조금도 신체장애로 인한 주늑듦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분 역시 신체장애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많았을 것이나, 하실 수 있는 일에 시선을 돌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바쁘게 일하셨다. 그 사실을 알고나니 이미 안 계신 엄회장님이 더 좋아졌다.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것도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약점이 되겠지만, 나처럼 성격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그 크고작은 장애 때문에 자신을 더 작게 보기 쉽다.  약점에 집중하지 말자, 내게도 분명 잘 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잘 하는 일은 단 한 가지면 족하다. 거기에 집중하고 집중하고 더 집중하면, 분명히 나도 먹고살고,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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