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경험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일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기도 하다. 나의 상실은 누구에게도 이해되지 못할 것이며, 나도 누군가의 상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상실의 이야기를 쓰고 나누는 이유는 슬픔, 분노, 좌절, 붕괴, 애도와 같은 상실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상실을 처음 마주한 순간, 우리는 철저히 무너진다. 상실을 통해 “완전히 망가져버린 느낌 또는 불편한 느낌”¹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로써 상실을 경험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때때로 발작처럼 갑작스럽게 습격하는 활기”²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 생의 감각은 내 안으로 들여보내기도 밀어내기도 쉽지 않은 반가우면서도 여전히 어색한 친구의 방문과도 같다.
지난해부터 닥친 세 번의 연속된 상실은 가족 모두를 기나긴 고통의 터널로 몰아넣었다. 봄이 멀지 않은 어느 날 아침, 당뇨 합병증으로 투석조차 어려워하던 누나가 떠났다. 엄마와 아버지는 팔을 하나 끊어낸 것처럼 비탄에 빠졌고 절망했다. 그해 가을 요양원에서 몇 년을 지내시다가 건강지표가 악화되며 병원에서 치료받던 할머니가 떠났다. 가족들은 100살 가까이 살다 가셨으니 호상이라며 다독였지만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었다. 위암 수술 후 암이 재발한 엄마가 마지막으로 떠나자, 아버지는 두 팔을 끊어낸 듯 비통해했고 남은 두 아들은 그녀의 영원한 부재를 애도했다. 그러다가도 남은 자들은 살아가기 위해 기운 내보려 애써 웃기도 했다.
모두가 가느다란 촛불을 오래오래 켜두고 있다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불을 꺼트렸다. ‘초는 다 타면 꺼진다’라는 이해와 ‘촛불이 꺼졌다’라는 경험은 하나로 이해될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내 곁에서 오랜 시간 나를 밝혀주던 빛들이 사라지자 나는 어둠 속에 갇혔다.
엄마는 나의 삶을 가장 환하게 비춰 주던 빛이었다. 엄마와 나는 단순히 가깝다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복잡한 관계였다. 내 삶과 마음은 엄마에게 활짝 열려 있었고 엄마는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삶을 사는 자식을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혹은 그 이상 받아들여 보려 애썼다. 그리고 수년 동안 엄마의 항암 과정을 쭉 함께하며 나는 당신의 삶의 마지막 과정을 어떻게 수용할지, 당신은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낼지 끊임없이 고민했고, 몸으로 겪어내었다.
당신은 자신을 극한으로 몰고 가서라도 자식을 돌보고 지키려는 엄마였고, 암을 이겨낼 수 없다는 생각에 종종 생의 의지를 내려놓았던 한 사람이기도 했다. 강인한 어머니와 연약한 한 인간, 그 두 모습을 모두 지켜보며 나는 경험하지 못할 세계를 곁눈질하듯 배웠고 그 가르침은 감히 내가 시도조차 하지 못할 고난과 인내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글은 너무나도 강했던, 그럼에도 너무나도 유한한 한 인간을 곁에서 지켜보며 들었던 것을 담아내고자 한 기록이다.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을 언제나 두려워했던 엄마에게 말과 글을 돌려주고 싶다.
오래전부터, 이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책으로 만들 수 있다면 책을 만지게 해드리고 곁에서 읽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리석고 게으른 아들은 여기저기 기록을 흩뿌리기만 했고, 그 사이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이제서야 그 기록을 모아 엄마를, 그리고 나를 애도하고자 한다. 엄마와 나, 그리고 몇몇이 아는 기억을 유한한 형태로 남겨 그녀의 삶을 말하고 싶었다. 유난히 슬픔을 잘 수집하는 나라는 수집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이자 위로다.
2025.12.16.
¹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11.15.'
²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