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을 맞아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부모님댁이라고 쓰려다가 이제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저 단어를 써도 되는 것일까 고민했습니다. 아버지댁이라고 쓰기에는 쓸쓸하고, 부모님댁이라고 쓰기엔 아직 슬픔이 여전한 그곳. 본가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본가라는 말보다 고향집이라는 표현을 선택한 건, 고향라는 단어가 주는 그리움과 정 때문이었습니다.
고향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집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허술하게 걸어놓은 자물쇠를 보니 분명 집앞 마트에 입점한 정육점에서 막걸리를 한 잔 하고 계시겠구나 싶었습니다. 동생이자 친구이자, 이웃이 된 정육점 아저씨는 언제나 아버지를 반겼고 아버지도 기꺼이 그의 환대에 응했습니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언제나 덩달아 저까지 환대를 받았죠.
마트에 들어서니 정육점 한 켠에 마련된 자그마한 방에서 아버지는 막걸리를 드시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저녁에나 올 줄 알았는데 일찍 왔구만. 막걸리 한 잔 할래?”라고 술잔을 건넸습니다. 아버지식 반가움의 표시였습니다.
아버지께서 건네주신 술잔을 물리며, 어버이날이니까 정육점 아저씨와 마트 아저씨를 모시고 식사 대접하고 싶다고 하자, 아버지는 내심 기쁘셨는지 바로 아저씨들을 소집했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돼지곱창전골 전문점을 미리 예약해두고 어르신들을 차로 모셨습니다. 돼지곱창전골이라는 메뉴를 듣자마자 누린내가 날까 겁부터 났는데, 막상 먹어보니 돼지곱창의 은은한 육향이 식욕을 돋웠습니다. 주당이기도 한 아저씨들에게는 최고의 안주였죠. 항상 정육점 아저씨가 운전기사 역할을 했으나, 오늘은 제가 운전기사를 자처했으니 모두 흥이 오를 대로 올랐습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계산을 하고 나오자, 정육점 아저씨가 즉흥 여행을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 집에만 있기는 아깝잖아. 칠갑산에 가자! 정상에서 막걸리를 마시자!”
술기운과 화창한 봄날의 기운이 어우러져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어른의 소원을 들어드리는 지니가 되어 흔쾌히 차를 끌고 산으로 향했습니다.
어르신들은 이곳저곳에 갈 때마다 식당에 들렀고, 점점 더 만취상태가 되어 갔습니다. 점점 더 어린아이들처럼 웃고 말하고 떠드는 모습에 어버이날은 어쩌면 어른들이 모든 짐을 내려놓고 아이가 되어야 하는 날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덥지 않은 농담에도 깔깔거리며 웃었고, 개울가에서는 물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60살, 70살이 넘어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아이가 숨어있었습니다. 이렇게 술기운을 빌려야 겨우 그 아이가 나올 수 있었죠.
우리는 호수를 둘러싼 둘레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정육점 아저씨는 자신이 너무나 취했다는 걸 알았는지 산책을 하며 술을 깨자고 제안한 것이었죠.
둘레길을 걷다가 산비탈에 세워진 돌탑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그걸 보고는 아버지는 말씀도 없이 산비탈을 올랐습니다. 그리고는 크고 단단한 돌들을 찾기 시작했죠. 술도 취한 상태에서 저러다가 넘어지면 크게 다칠 것 같아 말렸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묵히 적당한 돌들을 찾았습니다. 돌을 이리저리 돌리며 쌓아 올리는 아버지 안에서는 어떤 아이가 간절한 소원을 빌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큰주춧돌 위에 작은 돌들을 정성스레 쌓아 올리고는 비탈길을 내려와 손을 털었습니다.
“아버지, 소원은 빌었어요?”
제 질문에 아버지는 답하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다 마무리되어가고 아버지는 옆자리에, 그리고 두 아저씨들은 뒷자리에 모시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두 아저씨들은 여전한 흥에 농을 섞은 아재재그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석양이 내리고 붉고 노란 빛이 아버지를 비추었습니다. 아버지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훌쩍이지도 않았습니다.
잠시 뒤 아버지는 가장 후회되는 일이 있다고만 했습니다. 그게 뭐냐고 물었지만 집에 가서 얘기해주겠다고 하고 입을 닫으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에 와서 바로 누우시고는 잠들어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저도 오랜만에 고향집의 적막한 밤을 맞이했습니다.
아버지는 다음날 아침 일찍 부산하게 주방을 오가며 돼지고기 김치국으로 해장국을 끓였습니다. 김치찌개와 김치국 사이에 있는, 아버지만이 끓일 수 있는 누구도 모방하기 어려운, 언제나 믿고 먹는 아버지의 시그니처 메뉴였습니다.
“어제 말씀하시려던 게 뭐였어요?”
아버지께 물었지만 아버지는 술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차마 꺼낼 수 없었던 말이었을까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오늘 본격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합니다. 오늘은 엄마의 상속을 마무리짓는 날입니다. 엄마의 사망신고도 제 손으로 직접하긴 했지만 상속 문제는 좀 멀리 미뤄두고 싶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어떤 흔적으로 남겨두고 싶은 욕심이었죠.
하지만 미룰 수 없을 정도로 미뤄왔기에 이제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시청과 등기소를 오가며 엄마가 남긴 마지막 것들을 아버지의 것으로 돌렸습니다. 아버지, 형, 그리고 제가 발급한 두꺼운 서류더미와 수백만 원의 세금을 내고서야 엄마는 모든 법적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이제 엄마를 잡고 있는 건 우리의 기억뿐이었죠.
그리고 해가 떨어지기 전, 엄마를 보러 갔습니다. 가족묘에는 작년에 세상을 떠난 누나가 먼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뒤로 떠난 할머니는 호국원에 모셔진 할아버지 옆으로 가셨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돌아가셨고, 누나의 옆에 누웠습니다.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엄마의 얼굴을 씻기듯 비석을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오랜만에 “엄마”라고 불러보았습니다. 엄마는 없지만 그곳에서는 엄마를 불러도 이상하지가 않았죠. 엄마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우리는 잡초를 뽑고 주변을 정리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로 삼겹살을 먹기로 합니다. 아버지는 고기도 잘 굽는다. 혼자서도 잘 하지만 혼자가 된 아버지는 너무나 빨리 쇄약해지고 있었다.
적막한 분위기를 달래고자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내란과 탄핵의 시간을 지나오며, 여당과 야당의 대선 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저와 정치성향이 극과 극으로 다른 아버지에게, 이번에는 제 뜻을 생각해달라 당부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러겠노라 답했습니다.
우리 둘은 조용히 고기를 구워 먹었습니다. 1년 전이라면 어미새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새끼처럼 누나는 고기를 받아 먹었을 테고, 엄마에게도 조그마한 상추쌈을 싸서 입에 넣어주느라 분주했었을 텐데, 유독 둘 다 젓가락질이 한산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정육점에서 떼온 삼겹살을 챙겨주시며 늦지 않게 출발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용돈도 자주 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퇴사 후 엄마 간병에 집중했고, 그 뒤로 아직 제대로 일자리를 잡지 못한 아들은 이렇게 종종 내려와 아버지와 말 없이 식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캘린더앱을 열어 다음 달 첫째 주 토요일에 '아버지와 함께'라고 적었다. 약속된 시간이 우리를 잠시나마 위로해주길 바라며 서울로 향하는 차에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