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의 삶이 영화다.
절친한 회사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불쑥 영화가 튀어나왔다. 코로나 시대에 한 동안 하지 못했던 그것, 바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극장에 가서 본 마지막 영화가 무엇인지 떠올리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애를 써봐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다 내가 먼저 영화 하나를 가까스로 떠올렸다. "맞다! 그거! 그! 엘사! 겨울왕국 투!" "아니다. 그 뒤로 하나 더 봤다. 그거 있잖아 그거... 아아아! 작은 아씨들!"
나는 6개월 전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홀로 본 영화를 생각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후배는 끝끝내 기억해내지 못했다. "아쿠아맨이었나? 아닌데... 그건 오래돼도 너무 오래됐는데..." "아아아! 기생충이었나 봐요... 아? 아니다. 그 뒤에 몇 개 더 봤는데, 뭐였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영화관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마음껏 즐기던 그 일상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지금도 당장 5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갈 수 없다. 눈 앞에 뻔히 보이는데 못하니 더 하고 싶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이 시간들에 희망보다는 체념이 조금씩 더 많이 생겨난다.
몇 시간 뒤 후배에게 카톡이 왔다.
"선배님! 저 생각해냈어요! 지난 1월 닥터 두리틀이었어요!ㅋㅋㅋ"
인생에서 영화 같은 일도 사라졌다.
월화수목금토일의 동선이 죄다 상암동 집, 상암동 회사, 다시 상암동 집이다. 출근해 먹는 점심의 십중팔구는 구내식당 혼밥이다. 나머지 끼니의 대부분은 집밥 혹은 배달음식이다. 평소 좋아하는 음식점에 갈 수 없다. 만나서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가족과 극소수 몇 명밖에 없다.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싶어도 집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삶 속에 당연히 영화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작년의 스케줄표를 보니 당시 그저 일상 속의 하나였던 일들은 모두 영화 같은 일이었다. 작년 여름 미국 클리블랜드로 떠난 MLB 올스타전 중계 출장, 가을의 제주 보름 살이. 사람들로 빼곡한 코끼리 열차를 타고 도착한 서울대공원에서의 봄 소풍, 아나운서국 전체가 한 장소에 모인 연말 송년회.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영화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본다.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상황이 가장 최고의 순간이라면? 앞으로 더 악화될 일만 남아있다면? 더 큰 재앙이 닥치게 된다면?
산드라 블록 주연의 영화 <버드 박스>에서는 눈을 뜨고 앞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된다. 앞을 볼 수 없는 세상에서 주인공은 안대를 하고 싸움을 이어간다.
<콰이어트 플레이스>라는 영화에서는 소리 내는 모든 사람들이 괴생명체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 작은 소음도 허용되지 않는 삶 속에서 손짓, 발짓으로 소통하며 저항한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보다 현실이 더 무서웠던 일들을 그동안 너무나도 많이 봐왔다. 무슨 일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
더 이상 잃어서는 안 되는, 일상의 당연함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감사한 일은 무엇일까. 매일 같은 동선, 같은 식사, 같은 사람들만 마주하는 똑같은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화 같은 한 장면은 무엇일까.
마스크 쓰고서라도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한 집에서 잘 수 있다는 것. 한적한 틈을 타 집 앞의 산책이라도 나갈 수 있다는 것.
이런 것들도 훗날, 영화처럼 느껴지는 말도 안 되는 한 장면이 될 수도 있다.
영화에는 반전이라는 것이 있다. 반전의 극대화를 위해 앞부분을 지루하고 길게 빼기도 한다. 조금은 오래된 반전 영화의 최고봉 <식스센스>가 그랬다. 아직도 기억하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반전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 지루하고 긴 시간이 아닐까. 역대급 반전으로 다시 진짜 세상으로 뛰쳐나가기 직전의 상황이 아닐까.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SF영화 <아일랜드>에서 복제인간들이 자신의 진짜 삶을 위해 세상으로 뛰쳐나가던 장면처럼 우리도 곧 뛰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기다린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반전, 우리의 진짜 세상으로 회귀하는 그 순간을 기다린다.
얼마 전 명동을 다녀왔다는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명동에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 그런 거 처음 봤어. 꼭 죽은 자들의 도시 같더라."
죽은 자들의 세상이 펼쳐지는 영화, 밀라 요보비치 주연의 <레지던트 이블>이나 브래드 피트 주연의 <월드워 Z> 같은 영화 속의 사람들은 인류의 종말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치열하게 삶을 이어간다. 악몽 같은 세상 속에서 최선의 것들을 찾으며 살아간다. '뉴 노말'에 적응해가며 더 이상 잃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영화는 언제나 현실이 됐다. <레지던트 이블>에서 결국 지구는 멸망하지만 <월드워 Z>에서 인류는 결국 바이러스를 이겨낸다. 당연히 <월드워 Z> 쪽이길 바란다.
혹여나 <레지던트 이블>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으며 살아야겠다. '내 인생'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들과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지키며 살아야겠다. 폴싹 망한 영화여도 내 삶은 내가 주인공인 영화니까. 그리고 함께 출연하는 사람들은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내 마지막 영화는 바로 지금의 내 삶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