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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진 Sep 13. 2020

성실함이라는 저주받은 능력

타고난 천재 말고 만들어지는 천재도 있다.

이 글은 제 에세이 <포기할까 망설이는 너에게>에 실린 글입니다.



누군가 내게 “가장 잘하는 게 뭐예요?”라고 물으면, 나는 내가 가진 유일한 특출한 능력을 하나 떠올린다. 그리고 대답한다. “음....... 저는 몇 날 며칠 몇 시에 항상 같은 자리에 가있는 걸 가장 잘해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반에서 가장 빨리 등교하는 학생이었고, 지금도 회사에 가장 일찍 출근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잘하진 못해도 성실하죠. 이놈의 성실”


 그렇다. 나는 성실하다. 어마어마하게 성실하다.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꾸준하고 답답할 정도로 성실하다. 혹은 그런 모습을 보이려고 애쓸 때도 있다.

 스스로 성실하다고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인생 내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이 능력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엔 내게 주어진 이 성실이라는 녀석이 저주받은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처럼 한방에 확 터트릴 수 있는 파괴력 넘치는 능력을 주시지.......’ 뭘 해도 시간이 한참 걸리는 이런 보잘것없는 능력이 내게 왔는가 싶었다. 남들처럼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싶었지, 이렇게 잰걸음으로 수십 걸음을 걸어 따라잡는 일은 참 재미없고 따분한 일이었다.

 덕분에 삶이 참 피곤해지기까지 했다. 성실한 사람은 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항상 뭐라도 해야 하니까 일이 없으면 찾아서라도 해야 한다. 사실 그럴 땐 조금 쉬면 되는데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거다.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다. 왠지 쉬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계속 든다. 속도가 워낙 느리기에 조금이라도 쉬면 또 한참이 지체되니까.


 조금 언짢으신 분도 계실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이 말은 인용해야겠다. 나처럼 저주받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니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말 자체로 좋은 말이니 잠시 미운 옆 나라와의 관계는 제쳐두자. 일본은 나도 좋아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고 뭔가를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천재라고 한다면, 나는 절대 천재가 아니다. 하지만 피나는 노력 끝에 뭔가를 이루는 사람을 천재라고 한다면, 나는 천재가 맞다.”

 일본은 물론 메이저리그까지 완벽하게 정복한 야구 천재 스즈키 이치로의 말이다. 언젠가 한 기자가 그에게 스스로를 천재라 생각하느냐 물었고,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이치로는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는 지독한 루틴과 혹독하기까지 한 성실함으로 유명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 그저 감탄스러운 선수였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했다. 그동안 나는 한 분야에서 뭔가를 이뤄낸 사람들은 모두 천재형인 줄로만 알았다. 타고난 재능에 적당한 노력을 얹어서 탄생하는, 우리가 흔히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진짜 천재가 생각하는 천재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독하다 못해 혹독하기까지 한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진짜 천재였던 거다.

 ‘세상은 1%의 천재들이 나머지 99%의 사람들을 이끌어간다.’라는 말을 흔히들 한다. 물론 그 1%에는 타고난 천재가 많을 거다. 하지만 반대로 만들어진 천재도 분명히 있다.




 신입사원 때 가장 싫어하는 말은 이거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선배들의 대답,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해, 잘해야 돼.”

 진짜 짜증 났다. 처음부터 어떻게 잘하라는 말인가. 그러는 너는 처음부터 잘했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왜 그리 그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을까 돌아보니, 내가 천재가 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타고난 천재 말고도 만들어지는 천재가 있다는 걸 몰랐으니 타고난 천재가 아닌 나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타고난 천재는 아니지만 만들어진 천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굳이 천재가 꼭 돼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물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왕 태어난 본 거, 뭐라도 한번 해보고 싶기에 천천히 나아가 본다. ‘언젠가 천재가 될 수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한 걸음 한걸음 잰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 본다. 저주받은 아이 해리포터도 결국 해피엔딩 아니었던가. 저주받은 성실함으로 성실하게 해피엔딩을 만들어 보련다.


 마지막으로 한 선배의 말씀을 인용해본다. 내가 부여받은 성실함이 저주받은 능력이라는 생각을 점점 버리고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또 하나의 말이다.


“좋아하는 일이면 오래 해. 오래 하면 너 욕하던 놈들은 다 사라지고 너만 남아.”


-1990년 3월부터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MBC <배철수의 음악 캠프>를 이끌어오고 계신 배철수 선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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