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셔야 해요. 엄빠!
건강검진센터에 들어가니 상담실 한 자리의 어르신께서 역정을 내듯 말씀하고 계셨다.
"돈 안 든다 해서 한다고 한 건디, 그럼 그건 안 할 거니까는! 취소해주쇼!"
상담원이 난처해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버님, 이건 아드님께서 예약하신 거예요. 그러지 마시고 전화라도 한 통 해보세요."
"됐소... 그놈 바빠요. 난 그건 안 받을 거니까는! 뭐하러 그걸 그 돈 주고 받아. 멀쩡한디..."
조심스레 말씀하시는 어머님도 보였다.
"아이고.... 그거 초음파 검산지 뭔지 그거 하면 비싼 거 아녀유? 난 그거 신청했는지 몰랐는데..."
"어머님 이건 기본 선택 항목 중에 하나예요. 추가 비용이 들거나 하진 않아요.
"그럼 다행인데..... 이건 또 뭐여유? 저선량 씨티? 이런 건 돈 많이 들지 않나유......"
이런 비슷한 이야기들을 몇 년째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매 년 다른 날짜로 예약을 하는데, 아니 날짜가 무슨 상관이람, 매년 같은 날짜에 예약을 한다 해도 똑같은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복사해서 붙여놓은 것 같은 장면이 매 해 반복되는 걸까.
그렇다. 그 이유밖에 없다.
우리들의 부모님이라서.
모두 같은 부모여서 그렇다.
자연스레 엄마, 아빠 생각이 났다. 나는 마흔을 넘긴 지금도 아어(아버지,어머니)보다 굳이 엄빠(엄마,아빠)라고 부른다. 아어는 엄빠보다 거리감이 느껴진다. 아어에게 내가 엄빠가 아닌 아어라 하면 왠지 내가 너무 커버린 느낌이 들 것 같고, 그럼 괜스레 아어의 인생이 저무는 느낌이 드시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든다. 그래서 아어를 아어보다는 엄빠라고 부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다.
아무튼 건강검진의 첫 관문인 상담 코너에서부터 엄빠 생각이 나를 강하게 지배했다. 사실 나이 마흔 언저리의 나보다 엄빠께 더 자주 건강검진을 해 드려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그걸 챙기기가 쉽지 않다.
"엄마, 여기서 건강검진 받아보자."
"지난번에 왕십리에서 했고, 이제 6개월 뒤에 또 가면 돼. 다 챙겨서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늘 돌아오는 대답은 "걱정 마" "알아서 할 게" "괜찮아" 등의 말이다.
조금 더 강력하게 밀어붙여서 회사에서 지원하는 최신식 시설에서 하게끔 유도해보고 싶은데 시기가 안 맞는다, 지난번에 했다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으레 거절하신다.
뭔가 이상하다. 건강검진이 가장 필요한 엄빠는 그때그때 이상할 때마다 그냥 동네 병원이나 보건소 무료검진을 가시고, 아직까지 큰 탈 없고 그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지 않는 나는 최신식 시설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챙겨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나는 직장인이기에 고용주가 나의 건강을 관리해줄 의무가 있고, 또 산재 보험 등 여러 가지가 얽혀있으니 꼬박꼬박 하긴 해야 하지만, 그래도 뭔가 조금 많이 이상하다.
사실 우리의 부모님들이 다 똑같다. 허리 아픈 건 기본이고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그런데 병원은 안 가신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대개 '나는 멀쩡하다.' '내 몸은 의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등으로 비슷하다. 그리고 아파도 안 아픈 척들 하시는 건 1등이다. 조금 아픈 건 웬만하면 참아내는 능력 또한 둘째가라면 서럽다. 우리나라가 아주 가난하던 시절, 매일 먹을 게 없어 주린 배를 부여잡고 생활하던 부모님 세대, 아프면 돈 나가니 아프지도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그 시절의 나쁜 습관이 배어있기도 하다.
입사 3~4년 차 때, 그러니까 나는 서른 정도, 엄빠는 예순 정도 되셨을 당시에 건강검진에 가는 일은 그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귀찮은 일 중 하나였다. 검진 센터에 도착해서 처음 통과해야 하는 그 상담실에선 그 어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나도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니,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경들이 강렬하게 날아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들리지 않던 소리들도 귀에 맺혔다.
예전엔 하나도 잘 몰랐지만 이제는 어느덧 두 가지를 모두 알게 되었다. 자식들을 위하는 세상 모든 부모들의 마음과, 부모님을 걱정하는 세상 모든 자식들의 마음을.
오늘도 내일도 부모님이 건강하시길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어렸을 때 왜 그런 말을 그리 자주 하시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그 말, 엄빠가 할아버지께 지겹도록 하시던 그 말도 이제는 내가 맘 속에 되뇌고 또 되뇐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아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