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설레고 쓰려도 기대되는 실패 이야기
출간에 대한 또 다른 원대한 꿈이 있긴 하지만 가장 먼저 에세이를 내고 싶었다. 학창 시절 고2 때 담임 선생님이 일기 숙제를 내주고 매일 검사했는데, 모두들 싫어하던 그 숙제를 나는 좋아했다. 무엇이든 끼적이는 건 내 일상이었고 그냥 내 삶의 방식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방 어디에서든 무언가 빼곡히 적힌 메모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각종 자료들은 내 삶의 일부였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내 책을 내보고 싶다.'
투고를 하며 가장 크게 느꼈던 건 서점의 진열대 위엔 저렇게나 책들이 많은데 왜 내 원고를 마음에 들어하는 출판사는 왜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었다. 여행을 마치는 순간, 타고 있던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내리기 전 수많은 아파트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서울에 아파트가 저렇게나 많은데 내 아파트 한 채 갖기는 왜 이리 힘든 거냐라고 생각했던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전혀 다른 상황인데 결이 비슷했다. 사실 내 못난 글솜씨를 탓해야 정상인데, 나도 사람인지라 괜히 출판사에 대한 원망부터 샘솟았다.
언제나 탈락은 쓰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몇 곳의 쟁쟁한 출판사들은 역시 내 원고를 받아주지 않았다. 출간 계획서를 꼼꼼히 작성해 샘플원고와 함께 여러 곳에 보내봤지만 내가 기다리던 그 연락은 쉬이 오지 않았다. 물론 글의 완성도라든가 화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걸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참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다 알고 있었다. 무수한 실패와 거절, 탈락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해리포터>를 쓴 조앤 롤링도 출판사로부터 12번의 거절을 받지 않았던가. 그런 작가도 십 수 번의 거절을 받았는데 나 같은 무명이 한 번에 될 리가 없지 않은가.
탈락의 아픔을 잊는 최고의 방법은 다음 출판사, 또 다른 출판사에 투고를 하는 것이었다. 탈락을 거듭할수록 나의 투고 방식도 진화했다. 출판사에 대한 분석을 시작했다. 나와 색깔이 맞을 것 같은 출판사를 선별해 우선적으로 내 글을 보내기 시작했다. 해당 출판사에서 발간한 책들의 제목을 모아봤고 내용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계획서에 넣을 샘플원고는 특히 더 공을 들였다. 내용도 조금씩 수정하고 디테일을 조금 더 잡아가면서 조금씩 발전시켰다.
마치 13년 전 아나운서 준비생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와 다른 게 하나 있었다. 떨어지는 과정들이 아프기고 쓰리기는 했지만 괴롭진 않았다. 오히려 더 좋은 자극이 됐다. 탈락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고 있었다. 같은 일을 13년째 하며 내가 자연스레 잃어버렸던 감정들을 되찾게 되었다. 물론 지금 내 일을 사랑하지만 워낙 익숙해져 그저 관성적으로 이어가는 면도 있다보니, 투고 후에 받아들이는 탈락은 참 설레고 기대되는 실패였다.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 치열하게 준비하게 됐으니까.
투고하고 기다리고, 답이 오면 실망하고 다시 투고하고, 다시 좌절하고 다시 투고하고, 하염없이 기다리고를 반복했다. 답이라도 빨리 주면 좋으련만 아예 답이 없는 곳도 있었다. 그런 곳은 약 2주 정도가 지나면 탈락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답답함에 전화를 걸어본 곳도 있었는데 아주 친절히 답해주었다. "하루에도 원고가 수십 통씩 도착해서요. 시간이 조금 걸려요. 죄송합니다. 2주 내로 연락드릴게요." 그곳에서도 물론 거절당했지만 그 친절함이 그냥 위로가 되었다.
투고를 시작하고 한 달 즈음 됐을까. 2월의 마지막 날로 기억한다. 그날 밤에 스포츠카를 사는 꿈을 꿨다. 일어나서 아내와 그 꿈 이야기를 한참 했다. 노란색 람보르기니로 보이는 슈퍼카를 꿈에서라도 샀으니 소원 성취했다고 말이다.
꿈 덕분에 기분 좋게 출근해선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라디오 프로그램 녹음을 한참 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불과 하루 전 투고했던 출판사 편집장으로부터 날아온 낭보였다.
"보내주신 원고 보고 기쁜 마음으로 연락드립니다. 출간 관련하여 논의하고 싶습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을까. 최소 10년은 더 된 거 같다. 아나운서 시험에 극적으로 합격했던 2007년 겨울, 그 이후로 처음이었던 거 같다.
그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오직 내 열정만으로 시작해 죽어라 노력해 결과까지 만들어 내는 그 순간 찾아오는 희열, 아마 겪어본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사실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거니까.
인생에서 몇 번 되지 않을 그 기쁨과 환희의 순간을 뒤로하고 이제 막 1차 원고 작업을 마쳤다. 당초 여름이면 나올 것 같았던 책이 11월로 밀렸다. 내 미천한 글의 잠재력을 알아봐 주고 선택해 준 편집장의 의견을 적극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콘셉트를 대폭 수정해 예순 개의 글을 완성했다.
이제 다시 기다린다. 편집장이 작업을 마치고 내 소중한 원고가 내게 다시 돌아오는 그 날을 말이다.
브런치 작가 친구이자 13년 전 독서실 총무와 학생으로 마주친 적이 있는 날아라 돼지 작가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고치고 고치다 보면 토 나오는 지점에 책을 내면 된다던데요..."
내 원고가 다시 돌아오면 토 나오도록 작업을 이어가야 할 거다. 토 나오도록 힘들겠지만 벌써부터 다시 설렌다.
연애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던 그 마음처럼, 아내를 수술실로 혼자 떠나보내고 곧 태어날 딸과 건강히 다시 볼 아내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그 순간처럼, 동네 바보 형이 갑자기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카메라 테스트를 보고 와서 결과를 기다리던 그때처럼, 투고를 위한 메일 전송 버튼을 클릭하고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렸던 그 시간들처럼.
나는 지금 다시 설렌다.